5·16군사정변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던 김준하 씨는 15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 20주기 추모식’에서 5·16 당시 청와대에서 벌어진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김 전 대변인은 “5·16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날 청와대에서 윤 전 대통령이 한 일에 대한 오해와 억측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4·19혁명 후 윤 전 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19개월 동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내며 격동의 현장을 지켜봤다.
○ “올 것이 왔다”고?
1961년 5월 16일 아침 청와대로 무장한 쿠데타군이 몰려오자 윤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전 대변인은 “분명히 그 말을 했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과 학자의 말처럼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거나 ‘장면 국무총리와의 대립 때문에 (군인들을) 반기는 마음에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사회가 ‘극심한 혼란 상태’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고 한다. 1960년 출범한 장면 내각에선 구파와 신파가 싸우다 5개월 만에 분당 사태로 이어졌다. 진보세력은 장면 정부 퇴진과 미군 철수 및 중립국 건설을 주장하며 전국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 군인들이 면담을 요구하자 비참한 심정에 한숨을 지으며 한 말이 ‘올 것이 왔다’였다는 것이다.
○ 쿠데타 진압 반대?
장면 전 총리는 자신의 회고록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에서 “매그르더(사령관)를 만난 윤 대통령이 진압할 뜻을 표시했다면 5·16정변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윤 대통령의 태도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기를 바랐고, 먼저 내통을 받았기 때문에 ‘올 것이 왔다’는 말을 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김 전 대변인은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미국 측 제안과 같이 국군 4만 명을 동원하면 안보가 위태로우니 유엔군이 반란군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정간섭을 우려한 그린 대리대사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친서로 쿠데타 인정?
5·16 다음 날인 17일 윤 대통령이 쓴 친서가 쿠데타를 인정하는 내용이었다고 알려진 데 대해서도 김 전 대변인은 강하게 반박했다. 16일 밤늦게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청와대를 찾아와 윤 대통령에게 쿠데타로 장성들이 동요하므로 친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휴전선 방어에 전력을 다할 것 △절대 동요하지 말 것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애국심을 발휘할 것 등 3개항이 담긴 대통령 친서가 작성됐다. 김 전 대변인은 “내가 친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이한림 1군사령관과 민기식 1군단장, 최석 5군단장을 차례로 만나 직접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장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윤 대통령이 김 대변인을 이한림 사령관에게 보낸 것은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썼다. 이에 대해 김 전 대변인은 당시 장성들의 태도를 일일이 소개하며 “군은 쿠데타 세력과 반대 세력으로 양분돼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대통령 친서가 들어갈 틈새는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 하야 번복은?
1961년 5월 19일 당시 윤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으나 다음 날 이를 번복한다. 이에 대해 김 전 대변인은 “무정부 상태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일 김용식 외무차관이 윤 대통령을 찾아와 “장면 내각이 총사퇴하고 대통령이 유일한 헌법기관인 상황이라 하야로 인해 무정부 상태가 돼 각종 국제 조약이 무효가 될 수 있다”고 알려왔고 윤 대통령은 내부 법률 자문을 거쳐 하야 발표를 거둬들였다는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박희태 국회의장을 비롯해 김수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 권영세 박진(이상 한나라당) 원혜영(민주당) 심대평 의원(국민중심연합)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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