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대표 아니세요?” 알몸으로 면도하던 남성 다가오더니…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17일 20시 38분


대중목욕탕서 씻고 식사는 4500원짜리 콩나물국밥손학규 민주당 대표 천막농성 동행취재기

"이럴 때 '아, 내가 노숙하고 있구나'하고 새삼 깨달아."

17일 새벽 1시, 전북 전주 완산구 중앙동에 설치된 민주당 천막농성장.

손학규 대표가 손에 칫솔을 챙겨 천막을 나서면서 "밤에 씻을 곳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천막 바로 옆 공영주차장 구석에 있는 조그만 화장실에서 간단한 세면을 마치고 돌아와 천막 안에서 잠을 청했다.

손 대표가 한나라당의 새해 예산안 및 쟁점법안 강행처리에 반발해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이날로 아흐레째 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다섯 밤을 보내고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해 인천, 충남 천안, 부산을 돌아 전주까지 왔다.

거리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예산처리 무효화' 서명운동을 벌이고 '이명박 정부 규탄대회'를 열고 있지만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 "서명운동, 흐지부지 안 끝낼 것"

16일 오후 9시 반에 전주에 도착한 손 대표는 천막이 아닌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천막 근처 루미나리에 거리로 직행했다.

이미 일부 상점은 문을 닫았고 행인의 발걸음은 뜸했지만 상점 안과 거리에 있는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이명박 정권, 한나라당을 꾸짖어 주세요"라며 서명을 부탁했다.

1시간 가량 그렇게 골목골목 다니다가 "사람이 없다. 터미널로 가겠다"며 김완주 전북지사 등 몇 명만 대동해 터미널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천막을 찾은 것이 밤 11시.
서명운동에 나섰던 이 지역 국회의원, 지자체장, 지역의원 등이 모이면서 즉석 간담회가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손 대표는 "사람들이 '서명운동 시작만 해놓고 흐지부지 끝나는 거 아니냐'고들 하는데 그럴 일 없을 것"이라며 장외투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또 이번 장외투쟁에 대해 "인천에선 의원 40명이 규탄대회에 참여했고, 부산에서도 최고위원 한 명 빼고 모두 모였다. 의원들의 이런 반응은 흔치 않다. 어느 때보다 단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자평했다.

한 원외 지역위원장의 "민주당이 10년 집권 동안 야성(野性)이 사라진 것 같다. 야성을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달라"는 당부에 손 대표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장세환 의원이 "손 대표의 투쟁모습에 박수를 많이 보낸다. 이번에 그놈의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확실히 뗄 것 같다"고 말하자 손 대표는 멋쩍은 듯 웃기도 했다.

● 천막에 누워보니…

"이번 천막은 너무 커서 놀랐다. 따듯하고 좋다."

천막 안에는 대형 전기난로 한 대와 스티로폼으로 만든 매트리스, 요와 이불이 전부였지만 손 대표는 전기장판을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워했다.

전북 출신인 장세환 김춘진 최규성 의원도 잘 채비를 했다. 이춘석 의원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잘 자리를 빼앗겨 인근 모텔로 향했다.

기자도 바로 옆 작은 천막에 몸을 뉘었다. 전기장판은 없었고 난방기구는 전기난로가 전부였다. 이날 전주지역 최저 기온은 영하 9.6도. 천막 사이로 바람이 새 들어와 이불을 파고들었다. 점퍼까지 옷을 겹겹이 입은 채 누웠지만 추위에 제대로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 부산에서 한밤 중 갑자기 전기장판의 전원이 꺼져 옷을 더 껴입고 잤다던 손 대표의 말이 떠올랐다.

17일 오전 6시 반. 손 대표는 개운한 표정으로 천막에서 나와 살짝 뜬 뒷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오늘은 따뜻하게 잘 잤다"고 했다.

아침에 대중목욕탕을 이용하는 건 천막농성 후 빼놓지 않는 일정. 손 대표는 택시를 타고 가까운 목욕탕을 향하는 잠깐 사이에도 택시기사에게 "몇 교대로 일하냐?" "급여는 얼마냐?"며 이것저것 물어봤다.

차가 목욕탕 앞에 도착해서도 기사와의 대화가 끝나지 않아 한 동안 내리지 못했다. "교대 없이 일한다고? 처음 듣는 근무형태인데…." 목욕탕에 들어서면서도 기사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하루 중 가장 편안한 때라는 목욕시간이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 덕에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손학규 대표님 아니세요? 여기서 주무신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네요." 알몸으로 면도를 하고 있는 중년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손 대표는 민망한 듯 악수만 건넸다.

아침식사는 4500원짜리 콩나물국밥. "이번 투쟁엔 민주당이 제 역할을 못했다는 반성의 의미도 있다. 호위호식은 안 된다"며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던 손 대표였지만 이날 만큼은 아침부터 몰려온 지역 정치인들의 강권에 식당을 찾았다.

● "고생만큼 성과 없을 것" 우려도

오전 8시. 천막에서 최고위원회의가 9시에 예정돼 있었지만 식사 후 손 대표는 천막이 아닌 시청 앞으로 향했다. 출근길 직장인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기 위해서다.

손 대표의 한 측근은 "노숙이 체질인 것 같다. 돌아가며 보필하는 주변사람들이 먼저 지쳤다"고 했다. 다른 당직자는 "손 대표가 고생은 하는데 장외투쟁에 냉소적인 여론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고생한 만큼 성과가 나올지는 의문"이라며 "연일 강행군에 손 대표 몸이 상할 것도 걱정"이라고 말했다.

손 대표는 최고위원회의를 마치고 다시 거리로 향했다. 속옷을 제외하고도 상의 4겹, 하의 2겹. 목엔 머플러를 매고, 외투 위에 다시 한 지지자가 건넸다는 자주색 목도리를 둘렀다.

"한 중년 남성이 서명하면서 '예산안 진짜 막을 수 있냐'고 묻더라. 항의의 말로 들렸다. 서명운동 후에 뭘 할지 결정 못했지만, 당대표로서 민주당의 결연한 자세와 지향점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겠다."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동영상=국회 난장판 속 정부좌 손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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