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을 거듭해온 군 당국이 올해 국방백서에 ‘무력도발을 수행하는 북한정권과 북한군’을 ‘우리의 적’으로 명시하기로 했다고 27일 밝혔다.
국방부 고위 당국자는 “30일 발간될 ‘2010 국방백서’의 ‘북한의 위협’ 부분에서 ‘이러한 위협이 지속되는 한 그 수행 주체인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명시했다”며 “이는 북한의 도발이 지속되는 한 주적의 의미를 살려 북한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분명히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무력도발의 수행 주체인 북한군과 그 배후의 북한정권을 순수한 북한 주민과 차별화를 둔 것이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군 당국은 북한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상정하면서도 ‘이러한 위협이 지속되는 한’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2010년 국방백서는 ‘이러한 위협’의 예로 ‘북한은 대규모 재래식 군사력,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증강, 천안함 공격·연평도 포격과 같은 지속적인 무력도발을 통해 우리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군 당국이 ‘조건부 적 명시’라는 절충형을 선택한 것은 현재의 안보상황과 미래의 남북관계를 모두 고려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으로 풀이된다. 브리핑에 나선 국방부 당국자도 ‘북한이 향후 이런 위협을 가하지 않으면 북한은 더 이상 적이 아닌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미래형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겠다”면서 “현재의 안보 상황 등 여러 가지 각도에서 고민하고 검토한 표현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답변했다. ▼ 北 도발현실-통일염원 동시에 고려 ▼
군 관계자는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예상치 못한 북한의 잇따른 도발을 당하고도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지 못하면 겁쟁이
보수정권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북한을 고정불변의 적으로 규정할 경우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저버리는 일이 될 수 있어
양쪽을 모두 고려한 결정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남북 정상회담 개최 논의 등 남북관계
개선을 꾸준히 시도해 왔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민족 통일이라는 과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북한을 고정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향후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 남북관계 개선 움직임에 스스로 발목을 잡히는 꼴이 된다. ‘북한을 스스로
주적으로 규정해놓고 어떻게 주적과 정상회담을 하고 평화를 논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안보 전문가는 “북한 주민을 북한정권 및 북한군과 분리해 적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은 북한의 레짐(체제 또는 정권)을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며 “한국의 적은 북한정권과 북한군임을 명백히 해 북한 주민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두려움이나 적개심을 갖지
않도록 하면서 동시에 북한정권의 변화에 동참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군 당국이 북한을 ‘조건부 적’으로
명시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국방백서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북한을 주적으로 상정하면서…’라고 규정했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한 뒤 주적 표현은 백서에서 사라졌다. 매년 발간되던 국방백서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년간
발간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2004년부터 국방백서를 격년으로 발간하면서 북한을 ‘직접적 군사위협’이라고
표기했다. 2006년 백서에는 ‘심각한 위협’이라고 표현했다.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주적 개념을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2008년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으로 수위가 다소 높아졌을 뿐 주적 표현은 부활하지 않았다.
2010년 백서도 2008년 수준으로 표기될 예정이었으나 3월 천안함 폭침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는 주적 개념 부활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주적 개념의 부활을 주장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국방부는 ‘주적 개념 부활을 논의한 적이 없다’며 거리를 뒀다. 2008년 백서 수준으로 북한의 위협을 규정한 2010년 백서가
거의 완성될 즈음 연평도 포격 도발이 일어났다.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군 당국은 발간을 한
달 정도 남겨둔 백서의 북한 위협 관련 대목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국방부가 조건부로 북한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 한나라당과 보수층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당장 국방부가 26일 ‘주적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자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는 27일 “우리 군이 여전히 정치적으로 눈치를 보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며
“주적이란 표현을 당당히 쓰면 되는데 굳이 다른 표현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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