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0일 남북 국방장관급회담을 전격 제의하고 남한이 일단 회담에 응하기로 하면서 양측이 대화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됐다. 이번 북한의 회담 제의는 미중 정상회담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 북한, 서울 거쳐 워싱턴으로
남북이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대화 제의에 응하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북한은 궁극적으로는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북-미 관계를 개선해 당면한 대내외적 과제를 풀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결국 서울을 거쳐 워싱턴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노동당 대남기구 대신 군부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도 이전과 다르다.
남한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명의로 대화를 제기함으로써 남한이 요구한 대로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논의할 수 있는 ‘책임 있는 당국’을 내세운 것이다.
물론 고위급 회담이 열리지 못할 수도 있다. 예비회담 단계에서 의제가 조율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종전대로 ‘천안함 사건은 우리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연평도 사건은 자신들의 ‘영해’를 침범한 남측의 사격훈련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측과 또다시 기 싸움을 전개할 가능성이 크다.
또 북한이 비핵화 문제는 미국과 해결할 문제라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남측의 별도 회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한 당국자는 “국제사회의 제재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국면 전환을 위해 특유의 이중전술을 전개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대화가 열려도 별 소득이 없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과 미국 등 국제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며 융통성을 보일 경우 북한을 둘러싼 대화는 여러 갈래로 진행될 수 있다. 우선 미국과 중국의 합의 아래 6자회담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북한이 6자회담에서 비핵화 문제에 진정성을 보일 경우 자연스럽게 북-미 회담이 진전되고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0년 북-미 공동 코뮈니케가 예고했던 북-미 관계 개선과 경제지원 문제 등이 논의될 수 있다.
○ 비공개 청와대 안보회의
정부는 20일 미중 정상회담 공동성명이 나온 지 불과 8시간 만인 오전 11시 46분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국방장관급 회담)을 제의하는 북한의 ‘전통문’을 받고 분주하면서도 침착하게 움직였다. 외교 통일 국방 등 외교안보 부처 장관들과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의 핵심 참모들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 모여 북한의 전격적인 군사회담 제의의 배경과 대응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은 마침 비공개 외교안보관계 장관 회의가 사전에 예정돼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참석자들은 이 자리에서 북한이 시기와 장소를 우리 정부에 일임한 만큼 일단 예비회담에 응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또 천안함과 연평도 문제, 추가 도발 방지 문제는 전통문을 보낸 인민무력부 소관이지만 비핵화 의제는 인민무력부가 아닌 다른 대화 채널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후문이다.
이런 논의 과정을 거쳐 통일부는 이날 오후 8시경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 및 추가 도발 방지에 대한 확약을 의제로 하는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에 나갈 것이라며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확인을 위해 별도의 고위급 당국 회담을 제의한다는 정부의 공식 태도를 밝혔다. 앞서 국방부는 오후 7시경 북한의 회담 제의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예비회담·본회담::
예비회담은 본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자리로 본회담에 필요한 부수적인 사항들을 사전에 논의하고 준비한다. 남북한 군 당국의 예비회담에서는 통상적으로 대령급 인사가 참석한다. 예비회담에서 의제 설정에 실패해 본회담이 열리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해 9월 30일에도 남북장성급회담(본회담)을 열기 위해 남북군사실무회담(예비회담)이 열렸으나 천안함 사태 등에 대한 견해차로 의제 설정에 실패해 본회담이 무산됐다. 본회담은 예비회담에서 선정한 의제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 간에 본회담이 열린 경우는 남북적십자회담뿐이며 2009년 8월과 지난해 10월에 열려 이산가족 상봉 재개 등이 성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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