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石) 마도로스’. 친구들은 돌같이 심지가 굳은 석해균 삼호주얼리호 선장(58)을 이렇게 불렀다. 그는 집에서는 자기 몸이 쇳가루가 되더라도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가장이었다. 직장에서는 어떤 임무가 떨어지더라도 꼭 해내고야 마는 책임감 강한 선장이었다.
석 선장의 부인 최진희 씨(59·부산 금정구 장전동)는 23일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석 선장이 구출작전에서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해 “자기 삶을 버릴 줄 아는 용기와 강한 책임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 씨에 따르면 석 선장은 일년에 한두 번 집에 올 때도 꼭 두 아들에게 “자신의 위치에서 어긋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석 선장 바로 밑 동생 석영웅 씨(51)는 “어릴 때 형님은 남동생 두 명과 여동생 두 명에게도 항상 의젓하면서 자상했다”며 “테두리를 벗어나면 엄하게 꾸짖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석 선장이 해군에서 하사관으로 5년간 근무한 것도 큰 힘이 됐다. 밀양 운정초교와 무안중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명석했던 그는 밀양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가 사관학교에 가려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1971년 해군 하사관 12기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3년은 군함에서, 2년은 진해 해군작전사령부 예하부대에서 생활을 하면서 억센 바다와 싸워나가는 법을 터득했다.
그는 제대 후 곧바로 민간 상선을 탔다. 선원 생활부터 시작해 2등 항해사, 1등 항해사를 거쳐 2000년 꿈에도 그리던 ‘선장’이 됐다. 그만큼 책임도 컸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곧은 성격과 철두철미함은 선장역할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한 달 전 삼호주얼리호 선장 임무를 맡았을 때도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원래 삼호주얼리호처럼 화학물질이나 기름을 운반하는 삼호프리덤호 선장이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 삼호주얼리호의 키를 맡길 선장이 마땅치 않자 긴 항해를 마치고 목포항에 막 도착한 석 선장에게 한 번 더 임무를 완수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년간 운항을 하는 상선의 경우 국내에 한 번 들어오면 한 달 정도 휴식하는 것이 기본. 그러나 석 선장은 싫은 기색 없이 곧바로 삼호주얼리호에 탔다. 부인 최 씨와 큰아들 석현욱 씨(36)는 당시 “회사 일이니 내가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남편과 아버지를 말리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고 했다.
부인 최 씨는 “그동안 악몽 같은 하루하루를 살았다”며 “불쌍한 우리 남편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할 텐데…”라며 흐느꼈다. 그리고 “남자로, 남편으로, 아빠로 존경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