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지원하는 거액의 보조금을 ‘눈먼 돈’으로 생각하고 ‘먼저 먹는 자가 임자’라는 식의 ‘보조금 빼먹기’ 관행이 계속된다면 농촌에는 결국 보조금으로 지었다 버려진 창고와 온실, 축사, 잡초가 무성한 농지만 남게 될 것입니다.”
정부 보조금 사기사건 재판을 맡은 판사가 농민들의 ‘보조금 빼먹기’ 관행을 신랄하게 질타하고 지방자치단체와 사법기관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해 눈길을 끌고 있다. 광주지법 형사4단독 박현 판사(44·사시 37회·사진)는 10일 허위 서류를 이용해 국가와 자치단체 보조금을 챙긴 혐의(사기 등)로 불구속 기소된 임모 씨(60)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임 씨는 2006∼2009년 전남 화순군이 산림소득 사업의 하나로 추진한 산양삼 재배단지 조성사업을 통해 실제 쓰지도 않은 사업비를 쓴 것처럼 허위 증빙서류를 제출하고 보조금 1억2000여만 원을 챙긴 혐의로 기소됐다.
박 판사는 판결문에서 자치단체와 농민, 검경과 법원 등 사법기관을 차례로 거론하며 허술한 정부 보조금 사업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보조금 사업 시행자인 자치단체는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세금계산서, 간이영수증 등을 조사 없이 인정하고 형식적으로 현장을 실사한다”며 “심지어 허위 출장보고서까지 작성해 세금 낭비를 방치하고 있다”고 꾸짖었다.
농민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이어졌다. 그는 “허위로 보조금을 받은 농민은 농사보다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눈먼 돈이나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라며 “실제 가난으로 배움이 없어 묵묵히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 판사는 죄질이 나쁜 보조금 사기범들에 대한 법원의 관대한 판결도 문제 삼았다. 그는 “법원은 농민을 약자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보조금을 반환하든 말든 관대한 처벌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수사기관의 무관심, 법원의 선처가 지속된다면 농촌에는 보조금으로 지은 버려진 창고와 온실, 축사, 잡초가 무성한 농지만 남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 판사는 유명 TV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까지 거론하며 농민과 자치단체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1박2일’에도 나왔던 화순산 산양삼은 신뢰를 잃었다. 화순군이 지원한 보조금 수십억 원은 의미 없이 야산에 뿌려진 낙엽으로 불량한 자들의 호주머니를 채워주는 용돈이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화순군 산양삼 재배사업이 성공하려면 종묘의 대량 구입 가능성, 재배 적지 선택, 효능에 대한 연구 등 원점에서부터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애정 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박 판사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나도) 시골 출신이어서 정부 보조금이 어떻게 새고 있는지 그 실상을 잘 안다”며 “보조금이 농민에게 이롭게 쓰이고 신뢰받는 사업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판사는 전남 해남군 송지면 출신이다. 또 그는 “화순군 산양삼 보조금 사기사건으로 법원에 기소된 농민이 20여 명이나 된다”며 “농민들이 허위로 보조금을 타 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관행에 쐐기를 박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같이 판결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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