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가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미국과 일본에서 구명운동이 확산되자 한국 정부가 이들 국가의 한국 공관에 시위를 저지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외교통상부가 22일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30년이 지나 공개한 1980년도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 문서에 따르면 당시 외무부는 1980년 10월 29일 장관 명의로 “민단 및 친한(親韓) 인사를 최대한 활용하고 김대중 일당의 죄상에 대해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전개하는 등 모든 수단과 영향력을 행사해 반한(反韓) 활동을 저지 또는 약화시키기 바란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앞서 삿포로 총영사관은 1980년 7월 11일 “민단본부로 하여금 반정부 단체에 동조하는 (일본의) 혁신계 인사에게 ‘내란 음모자 김대중 구출서명 운동은 우방국가에 대한 내정간섭이며 적화통일을 기도하는 북괴의 음모를 조장하는 행동이므로 이를 즉각 중단하라’는 서한을 발송토록 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당시 일본 총리는 1980년 11월 21일 최경록 주일 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김대중 씨가 극형에 처해지면 북한과 더욱 적극적인 교류를 요구하는 (일본 내) 여론이 커질 수 있다”는 의견을 전하는 등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미국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이 한국 상황을 오판해 도발하지 않도록 중국에 협조를 요청했다. 에드먼드 머스키 당시 미 국무장관은 5월 22일 차이쩌민(柴澤民) 주미 중국대사를 불러 북한이 한국 내 정세를 오판해 모험을 하지 않도록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머스키 장관은 중국대사에게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따라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이 같은 방침을 소련 측에도 전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또 한국에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를 증파하는 등 모든 정보기관의 활동을 동원해 북한 동향을 주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1980년 7월 14일 스티븐 솔라즈 하원의원, 9월 2일 토머스 레스턴 전 국무부 부대변인 등 미국 고위관리가 잇따라 평양을 방문하자 북-미 간 교류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외교 노력을 펼쳤다. 정부는 미 국무부에 “레스턴과 같은 전직 고위 국무부 관리의 방북을 저지시켜야 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는 “미국 정부는 1977년부터 미수교국 여행금지 조치를 해제한 이상 미국 시민의 북한 방문을 막을 수 없고, 레스턴이 개인 자격으로 방문한 것은 미국 정부 정책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1980년 초반 정부는 지미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에 민감한 관심을 보였다. 1980년 2월 6일 김용식 당시 주미대사가 박동진 당시 외무부 장관에게 보고한 미 하원 군사위원회 비공개 청문회 내용에 따르면 존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상당수의 전투 병력이 철수된다면 북한의 공격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미 행정부가 1980년 2월 12일 의회에 제출한 ‘제4차 한반도 보고서’는 “철군 중지 결정이 한국 안보 공약 유지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유리한 전략적 위치 안정을 가장 잘 보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18일 미 상원 군사위도 “남북한의 군사적 불균형을 우려해 주한미군은 현 수준 이하로 감축해선 안 된다”는 보고서를 냈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1968년부터 4년간 약 45t의 저수준 방사성 폐기물을 동해상에 투기 처리했다. 투기지역은 울릉도 남쪽 12해리(약 22km)로 수심 약 2200m 지점이다. 투기된 폐기물은 방사능이 1년 안에 안전수준까지 자연 감소되는 저수준 방사성 폐기물로, 두께 15cm인 보관용기에 밀봉됐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5·18민주화운동,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과 관련된 18만여 쪽에 이르는 외교문서 1300여 권으로 서울 서초구 외교안보연구원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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