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다양한 선거제도 개혁 방안 중 석패율(惜敗率)제도 도입이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제도를 통해 호남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영남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국 정치의 최대 문제점인 지역주의를 타파하자는 데 여야가 공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정치권 한목소리
이재오 특임장관은 24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석패율제 도입에 대한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의 질문을 받고 “당장 19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적용하는 게 옳다”며 적극 추진 의사를 밝혔다.
2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김능환 중앙선관위원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김 후보자는 “여러 가지 장단점이 있을 수 있지만 (석패율제는) 우리 정치의 고질적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 검토할 수 있겠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라며 “기본적으로 찬성한다”고 답변했다. 김 후보자는 “선관위에서 관련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하면 전향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선관위는 선관위원들의 검토를 거쳐 석패율제에 대한 의견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도 지난달 신년연설에서 석패율제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민주당에서도 당 개혁특위 위원장인 천정배 최고위원이 이 제도 도입에 적극적이다. 이에 따라 여야가 2월 임시국회에서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하면 석패율제 도입 문제가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 왜 석패율제?
그동안 정치권에서는 지역주의를 극복할 방안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중대선거구제’ 등이 거론돼 왔다. 권역별로 비례대표를 뽑거나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대선거구제가 되면 특정 정당의 취약지역에서도 당선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제도를 도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제대로 하려면 비례대표 정원을 크게 늘려야 한다. 그러나 현행 선거법상 국회의원 총원이 299명으로 제한돼 있으므로 비례대표를 늘리려면 지역구 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 현역 지역구 의원들의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다. 현재의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하는 방안도 현역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여야 합의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반면 석패율제는 기존 비례대표제를 약간만 고치고도 도입이 가능하다. 정당 명부에 따라 뽑는 현행 비례대표 정원 일부를 석패율제 적용 대상으로 규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석패율제가 가장 손쉬운 선거 제도 개선 방안으로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회 입법조사처 이현출 정치의회팀장은 “석패율제가 지역주의 구도를 완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 방안”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여야가 취약지역에는 형식적으로 후보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당선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당도 후보도 선거운동에 소극적이다. 이 때문에 취약지역에서는 정당이나 후보자가 당선을 염두에 두고 민의를 수렴하는 활동을 사실상 포기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 기능의 약화를 의미한다.
석패율제가 도입된다면 낙선하더라도 선전(善戰)만 하면 비례대표로 당선될 기회가 있기 때문에 후보도 적극적으로 선거활동을 하게 된다. 당연히 취약지역에서 선거운동과 정당 활동이 활발해지고 정당의 전국적 기반도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 회의론과 반대론
그러나 서울대 정치학과 강원택 교수는 “실현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강 교수는 “석패율제를 통해 지역주의를 극복하려면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거나 호남과 영남에만 석패율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국 단위로 석패율제를 실시할 경우 수도권에서 아깝게 낙선한 후보가 대거 비례대표가 되고 정작 영호남에서 낙선한 후보들은 혜택을 못 받게 된다는 것이다.
또 막상 석패율제의 세부 내용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여야 모두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합의도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정치권 내에도 부정적 의견이 있다. 한나라당 김영선 안효대 의원 등은 최근 “선거란 주민 의사의 결정 과정인데 유권자가 외면한 정치인이 석패율 제도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주민들의 의사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석패율제 문제점은 ▼ 전문가 뽑는 비례대표 의미 희석… 유력정치인 당선도구 악용될수도
석패율제는 지역주의 타파의 물꼬를 틀 것으로 평가받으면서도 몇 가지 단점도 지닌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우선 현행 비례대표 정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석패율제를 도입하면 각 분야 전문가와 소수집단 대표의 정치적 충원이라는 비례대표제의 취지와 충돌할 수 있다. 지역구 투표에서 낙선한 후보를 배려하기 위해 순수한 비례대표 후보의 당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 이 제도가 자칫 거대 정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동시 출마해 쉽게 당선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유력 정치인들은 정치적 기반이 있어 지역구에서 낙선해도 높은 득표가 가능해 석패율에 따라 ‘부활 당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기득권이 있는 유력 정치인에게 유리하고 신진 정치인의 정치권 진입을 막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유권자들로서는 이런 유력 정치인들을 제대로 심판할 기회를 잃게 돼 사실상 선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출마한 지역구에서의 석패율보다 비례대표의 명부 순위가 당선을 결정하도록 석패율제를 만들었을 때는 명부 상위에 오른 중복 입후보자는 사실상 당선이 확실해지기 때문에 선거 운동을 소극적으로 할 가능성도 있다.
취약 지역 후보를 일방적으로 배려하는 쪽으로 제도를 도입할 경우 형평성 문제도 제기된다. 접전 지역에서 높은 득표를 하고도 아깝게 패배한 후보보다 취약지역에서 미미한 득표를 한 후보가 당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선된 의원이 지역 대표성을 갖고 의정활동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또 석패율제가 지역주의 완화를 포함해 효과를 보기 위해선 현재보다 비례대표 의원 수를 대폭 늘려야 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적지’ 출마 준비 정치인들 ▼ 한나라 정운천-이정현 “호남 교두보 마련” 민주 김영춘-송인배 “영남 與아성 깬다”
내년 19대 총선에서 이른바 ‘적진’에 도전하려는 정치인들에게 석패율 제도는 매력적이다. 석패율제 도입에 대한 여야 합의만 이뤄진다면 당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 타파의 물꼬를 텄다는 정치적 자산도 얻을 수 있다.
요즘 정치권에서 석패율제 도입을 가장 앞장서 주장하는 사람은 한나라당 정운천 최고위원이다. 이명박 정부 초대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을 지낸 정 최고위원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전북지사 후보로 나섰지만 지역주의 벽을 실감한 뒤 석패율제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만찬에서도 석패율제 도입을 주장했던 정 최고위원은 “처음부터 전국으로 확대 실시할 수는 없는 만큼 취지를 살리기 위해 우선 호남과 영남권에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대변인격인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도 석패율제 후보감으로 자주 거론된다. 전남 곡성 출신인 이 의원은 한나라당에서는 드물게 10년 넘게 호남에 공을 들이고 있다. 17대 총선에서 광주에 출마해 1% 남짓한 표를 얻은 이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비례대표로 등원한 뒤 일정이 없는 날이면 광주로 내려가 지역을 다지고 있다. 한나라당에서 석패율 도입 시 광주전남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0순위로 거론되고 있다. 이 의원 외에 사무처 간부 L 씨 등도 석패율제를 발판 삼아 호남에 진출할 후보로 거론된다.
민주당에서는 부산 출신인 김영춘 최고위원이 꼽힌다. 김 최고위원은 지난해 10월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된 뒤 야권통합의 교량 역할, 영남 지지기반 확보 등을 위해 19대 총선에서 부산 지역에 출마하겠다고 공언했다. 김 최고위원은 24일 통화에서 “특정 정당이 압도하는 지역에서는 타 정당 후보들이 출마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석패율제가 출마할 엄두라도 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지역구도 완화를 촉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 외에 2009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 당시 한나라당 박희태 후보에게 3000여 표 차로 진 민주당 송인배 경남 양산시 당협위원장도 석패율제 도입 시 민주당의 영남권 진출 가능성을 높일 후보로 꼽힌다. ▼ 日, 세계서 유일하게 석패율제 도입 ▼
석패율을 도입한 나라는 세계에서 이웃나라 일본이 유일하다.
일본의 총선은 우리나라처럼 각 지역마다 최다 득표자 1명이 국회의원이 되는 소선거구제(지역구)와 정당의 득표수에 따라 당선인 수가 정해지는 비례대표(전국구)로 나뉜다. 300명이 지역구로, 180명이 비례대표로 선출된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지역구 출마 의원이 비례대표 후보자로도 출마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비례대표 후보 명부에서 하나의 순위에 1명만 배정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여러 후보가 하나의 순위에 배정될 수 있다.
비례대표 후보 명부에서 순위가 같은 후보들끼리는 소선거구에서 당선자 대비 낙선자의 득표수 비율이 높은 후보자부터 당선이 결정된다. 소선거구에서 많은 득표를 한 낙선자일수록 비례대표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일본 자민당의 경우 지역과 비례대표에 중복 입후보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당 총재나 74세 이상의 후보는 지역에만 출마할 수 있다. 당에서는 선거구를 본래의 지지기반에서 옮긴 후보나 당이 중요하게 여기는 선거구에 입후보한 후보를 비례대표 높은 순위에 배치한다. 민주당은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중복 입후보자를 비례명부에서 가능한 한 동일순위로 배치해 석패율이 높은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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