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중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회의실. 이명박 대선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산하 일류국가비전위원회를 비롯한 참모그룹이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동남권 신공항을 비롯한 지역사업을 어떻게 대선공약으로 만들 것인가가 주제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동을 건 동남권 신공항은 당시에도 영남권 최대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영남권이 기반인 한나라당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공약이었다. 하지만 정식 대선공약으로 채택하기에 앞서 객관적 타당성 조사는 거의 없었다.
회의 참석자 가운데 이명박 후보의 핵심측근인 C 의원을 비롯한 정무 파트는 “이것 저것 가리다간 표 하나도 못 얻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으로 충청권에서 재미 본 것을 잊었느냐”고 채근했다. 경제관료 출신의 강만수 씨를 비롯한 정책 파트는 “결과가 뻔히 보이는 공약을 무턱대고 올릴 수는 없다. 그러다 나라 거덜 난다”고 반박했다. 참석자들은 격론 끝에 주요 지역사업을 중앙당 공약집이 아니라 지역·권역별 공약집에 따로 넣기로 절충했다.
최근 이 대통령의 공약이행 여부를 놓고 벌어지는 국가적 혼란은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 캠프 내에서 각종 지방공약들이 정책적 검증 없이 정치적 용도로 채택된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지방에서 강하게 요구하는 사업들은 국가정책으로서 엄밀성을 따지기보다는 지역표심을 고려해 떠밀리듯 지역별 공약에 슬그머니 집어넣는 일이 많았다고 캠프 관계자들은 전했다.
대선 당시 공약개발에 참여했던 한 여권 관계자는 “지역공약집에 실린 공약 일부는 각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국회의원들의 민원성 사업을 모아 만들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1일 기자회견에서 “공약을 모두 지킬 수 없다. 국익에 반하면 계획을 변경하는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 데는 이런 저간의 사정도 깔려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대통령이 지키지 못한 공약 가운데는 대운하 건설, 747 달성 등 ‘MB노믹스’의 핵심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중앙 차원의 공약도 물론 적지 않다. 이런 공약들은 정치적 반대나 경제여건의 변화 때문에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청와대 참모들의 항변이다.
반면 권역별 공약들의 경우 애초 국가정책으로서의 타당성보다는 지역별 유세용으로 시작됐다가 정권을 잡은 뒤 차일피일 집행을 미루는 바람에 논란을 빚고 있다는 점에서 중앙 차원의 공약들과 차이가 있다.
신공항, 과학벨트 말고도 지켜지지 않거나 추진이 더딘 다른 지역공약들이 적지 않다. ‘글로벌 메디컬 콤플렉스’ 건설은 대선 당시 가장 중요한 강원권 공약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엄기영 한나라당 강원도지사 보궐선거 후보자가 최근 다시 들고 나올 만큼 그동안 진전이 별로 없었다. 호남권 공약집의 국립노화연구소 설립이나 한국민주주의 전당 유치, 세계문화상품 복합단지 조성도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문제는 집권 3년이 넘도록 정부·여당 차원에서 지난 대선의 지역공약 이행 과정을 제대로 평가하고 집행계획을 체계적으로 마련하는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 초기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여권 관계자는 “지역 표심에 대한 유혹과 정책의 실현가능성 사이에서 당과 캠프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면 내년 대선에서 또다시 2007년 대선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지금부터라도 타당성 조사(B/C)를 포함해 당 차원의 기본적인 정책평가 수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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