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입법안 90%가 폐기… 부처들 뒤치다꺼리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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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21일 03시 00분


“실적 높이려 무분별 발의”… “의원들 제 역할” 의견 갈려

1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 이날 국회의원들이 입법 발의한 이자제한법 개정안과 전·월세 상한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상정됐지만 정부의 강력한 반대로 통과가 보류됐다. 이날 회의장을 나서는 금융위원회와 국토해양부 관료들의 어깨는 안쓰러울 정도로 처져 있었다. “법안을 구상할 때부터 반대 입장을 밝혔지만 서민 보호를 명목으로 경제논리에 맞지 않는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법안을 의원들이 올렸다. 대항 논리 자료를 들고 국회에 오가느라 정작 할 일은 못하고 진이 다 빠진다.”(국토부 관계자)

18대 국회 들어 급증하고 있는 의원 입법과 국회에서 수시로 요구하는 정책협의로 행정 부처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다. 이슬람채권(일명 수쿠크법안) 등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법안들이 국회 벽에 막혀 무산되는 반면 의원입법안에 일일이 대응하느라 업무 부담이 늘어나면서 관료들이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이중고(二重苦)를 겪고 있다.

정부 부처에서는 “국회가 상전(上典)”이라며 해도 너무한다고 불만을 털어내고 있지만 입법활동이 의원들의 제 역할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는 분석이 엇갈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가 정부 주도 관료제에서 ‘의회중심주의’로 옮겨가는 현상이 뚜렷한 가운데 입법부와 행정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 18대 의원입법, 17대의 1.5배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8대 국회 들어 발의된 의원입법은 4월 20일 현재 8933건으로 17대 5728건에 비해 55% 증가했으며 16대(1651건)에 비해서는 7배가량 늘었다. 법안은 의원이 발의하거나 정부에서 만들어 제출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지만 발의된 의원입법안 10개 중 9개는 원안과 달리 수정되거나 폐기 또는 철회되면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다. 실제 ‘건수 채우기’에 급급해 함량 미달이거나 지역구민을 의식한 포퓰리즘 성격이 짙은 법안도 부지기수다.
▼ 지역구 민원 해소 ‘포퓰리즘 법안’ 양산 ▼
정부-여당 ‘찰떡궁합’ 깨진 것도 한 몫


국회에서 회자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법안의 ‘아녀자’라는 표현을 ‘부녀자’로 바꿔 제출한 의원입법안이다. 이처럼 문구나 숫자만 몇 개 고쳐 발의하는 입법안도 적지 않으며 지역구 민원 해소용 입법도 많다. 후원금 등을 연결고리로 이익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의원들은 일부 이익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법안을 내기도 한다.

국회사무처의 한 관계자는 “17대 국회부터 시민단체와 언론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법안 발의 건수를 의원 실적과 연계하는 현상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며 “내용을 보지 않고 건수만 실적에 포함하기 때문에 함량 미달의 의원입법이 너무 많아 문제”라고 말했다. 또 의원 발의 건수는 재(再)공천과도 직결되어 있다. 실제 민주당은 공천 심사 배점 가운데 법안 처리 건수에 대한 배점이 30점으로 가장 높다.

정치학자들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여소야대’의 형태를 띠면서 여당과 정부의 공조가 크게 줄어 의회에 대한 행정부의 통제와 장악력이 함께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로 인해 정부가 입법을 주도하는 형태가 아니라 의원 주도로 바뀌었고 정당 지도부의 소속 의원들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지면서 의원들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게 됐다.

○ 노동 강도 높아진 행정부

의원입법이 크게 늘면서 관련 자료를 제출하거나 정책 설명뿐만 아니라 반대 논리를 펴야 하는 정부의 업무 부담은 크게 늘고 있다. 정부 부처 공무원 사이에서 국회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기획재정담당관실 직원들은 ‘호치키스맨’으로 불린다. 이들이 국회의원들의 질의 내용을 받아와 본부에 연락해주고 본부에서 회신이 들어오면 이를 출력해 해당 의원실에 갖다 주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메신저 역할뿐만 아니라 평소에 의원실 보좌진을 접대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다른 부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 국회 때보다 국회에 머무는 시간이 두 배가량 늘어난 것 같다”며 “당연히 평상 업무처리 시간이 줄어들어 체력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고 말했다.

정작 정부 관료들이 기분 나빠하는 것은 예전처럼 정부가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올라가면 잘 받아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거론하는 것이 재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이슬람채권 법안이다. 반면 공정거래위원회가 강력하게 반대했던 하도급법안은 의원들의 입김으로 무사 통과됐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가 서로 견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은밀하게 유착하는 경우도 많다. 환경부 A 사무관은 3월 정부 법안에 대해 설명하고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해당 상임위에 소속된 의원실을 방문했다. 하지만 의원실에서는 법안에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지역구 내 공장이 환경 관련 규제에 묶여 있으니 이를 완화해 달라”는 지역구 민원을 얘기하며 ‘딜’을 제안했다. A 사무관은 “의원이나 보좌진이 서운해하거나 밉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안 된다고 못 한다”며 “정부 법안의 통과와 지역구 민원 해결을 서로 거래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반면 정부가 국회를 이용할 때도 있다. 당정협의를 통해 민감한 법안이나 시급한 법안을 제출할 때 입법 절차가 간편하고 시간이 덜 걸리는 의원입법 형태로 발의하는 우회 입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공정위는 지난해 정부가 공정사회 대책인 9·29대책을 내놓은 뒤 연내 국회 통과를 목표로 허태열 의원을 통해 ‘하도급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 입법부에 대한 긍정론도 만만치 않아

이런 현상을 두고 예전처럼 국회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식물국회’나 절차만 추인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 ‘고무도장 의회(Rubber Stamp Congress)’보다는 훨씬 낫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틀을 깨는 입법이 의원입법에서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기술관료(technocrat)’인 공무원들이 의원들보다 전문성은 낫지만 국회 심의 과정을 통해 틀을 깨는 새로운 접근법은 의원입법을 통해 나온다. 탁상공론에 익숙한 공무원의 정책보다 현장과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한 의원입법이 더욱 현실적이며 공감하는 정책일 수 있다는 것. 임종수 국회 의안계장은 “의원입법의 가장 큰 장점은 제도권 밖에서 거론되는 사안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논의를 공식화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의결 과정에서 벌어지는 비효율적인 현상도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정치 과정에서 불가피한 비용이라는 주장도 있다. 박재창 숙명여대 정치행정학부 교수는 “의회가 하는 일이 모두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국가적인 낭비라고 얘기하는 건 행정관료들의 판단”이라며 “다만 국회의원이 얼마나 수준 높은 입법활동을 하느냐에 의회민주주의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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