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 처리 합의 파기 및 한나라당의 단독 처리 이후 민주당이 크게 휘청거리고 있다. 비준안 처리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허약하고 무책임한 리더십이 여과 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 합의 파기 후폭풍에 ‘네 탓이오’만
2일 여야정(與野政)이 ‘4일 한-EU FTA 비준안 본회의 처리’에 합의한 데는 박지원 원내대표는 물론이고 전병헌 정책위의장, 민주당 소속 김영환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최인기 농림수산식품위원장이 참여했다. 대기업슈퍼마켓(SSM) 보호법 등 이전보다 강화된 보완책도 어렵사리 얻어냈다. 그럼에도 ‘야권연대’ 파트너라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눈치를 살피다 막판 ‘반대’ 당론을 결정함으로써 책임 있는 공당(公黨)으로서의 신뢰를 잃었다. 야권연대에도 금이 갔다. 2일 박 원내대표로부터 여야정 합의 결과를 보고받은 손학규 대표는 4일 밤까지 중재는커녕 “지금은 처리할 때가 아니다”라며 이도저도 아닌 결정을 내렸다.
그럼에도 6일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네 탓’만 무성했다. 손 대표는 “FTA가 오직 국익이고 야4당 공조는 국익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흑백논리”라며 “우리는 정권교체를 위해 ‘야4당 공조’라는 원칙을 지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왜 여당은 SSM 보호법 등 피해대책 법안은 (비준안과) 함께 통과시키지 못했느냐”며 한나라당에 책임을 돌렸다.
이어 손 대표는 “민주진보 진영의 분열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당이 합의를 이루는 것은 개개인의 정치적 입장보다 중요하다”며 사실상 한-EU FTA 비준안 처리를 빌미로 자신의 정체성을 문제 삼고 나선 정동영 최고위원을 겨냥했다.
○ 정체성 논란에서 ‘반드시 저지’로
이에 정 최고위원은 “일부 의원이 우리 당의 강령과 정책노선에 대해 아직 이해가 깊지 않다. 당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손 대표의 말을 받아쳤다. 그는 “(비준 반대에 대한) 최고위원 다수 의견이 묵살돼 대단히 유감”이라며 여야정 합의를 주도한 박 원내대표에게 날을 세웠다.
천정배 최고위원은 “우리는 당내 의사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지도력도 훼손됐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불협화음의 근저에는 우리 당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견해차가 존재한다”며 FTA에 대해 어정쩡한 모습을 보인 손 대표를 자극했다. 천 최고위원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여야 간 합의가 파기된 경우는 수없이 많은데도 한나라당이 무조건 민주당에 ‘약속 위반’이라고 밀어붙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 9명의 최고위원 중 유일하게 한-EU FTA 비준안 처리를 외쳤던 박지원 원내대표는 느닷없이 한미 FTA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한미 FTA는 한-EU FTA와는 다르다. 반드시 막아낼 것이다”라면서 “무기력하게 미국에 끌려가는 이명박 정부는 어느 나라 정부인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EU FTA로 불거진 당내 논란을 한미 FTA 저지로 봉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당내에서조차 “한미 FTA는 노무현 정부에서 협상을 시작해 타결 서명까지 끝낸 현 민주당 세력의 작품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건 해야 한다”고 했던 사안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안팎에선 FTA 비준 동의안을 둘러싼 당내 혼선이 4·27 재·보궐선거 승리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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