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철 씨(오른쪽)가 1994년 7월 입국 기자회견을 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왼쪽은 같은 해 5월 입국한 강성산 전 북한 정무원 총리의 사위 강명도 씨. 동아일보DB
“잘못된 김정일 정권을 규탄하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는데….”
탈북자로서는 처음으로 고위공무원단 가급(옛 1급)인 통일교육원장에 기용된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대한민국 고위공무원에 임명됐다는 사실이 제대로 믿기지 않는 듯했다.
통일부는 7일 “공모 절차를 거쳐 조명철 박사를 신임 통일교육원장으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가 2만 명을 넘어섰지만 고위공무원에 임명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현재 공직에 있는 탈북자는 하나원에 근무하는 중앙부처 근무자 1명과 지방자치단체 근무자 14명 등 15명이 전부다. 그 외엔 1983년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월남해 공군 대령으로 근무했던 고 이웅평 씨가 있다.
통일부 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된 탈북자 출신 조명철 대외경제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 조 신임 원장은 김일성종합대에서 경제학부 교원으로 재직하다 1994년 남쪽으로 넘어왔다. 고위공무원단에 탈북자 출신이 임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동아일보DB조 소장은 “아직 통일부에서 아무런 연락이 안 왔다”며 전화 인터뷰에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통일부가 이미 발표했다는 얘기를 들은 뒤에야 “부족한 제가 개인적인 능력으로 됐겠느냐”며 “북한 주민이 자유사회에서 잘살기를 바라는 대한민국 사회와 국민들이 사랑을 베풀어줘 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조 박사가 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된 것은 ‘북한판 코리안 드림’을 이룬 사례로 탈북자 정착 지원에도 큰 의미가 있다”며 “단지 상징성뿐 아니라 남북관계와 북한경제에 대한 그의 전문성이 향후 통일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 소장은 향후 포부에 대해선 비교적 강단 있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북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실상을 알리는 교육이 필요하다”며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힘을 빌리면서 국민에게 정확한 실상을 알려 미래의 통일 준비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교육의 3대 요소로 △북한의 정확한 실상을 이해하고 △철저한 안보의식을 바탕으로 △통일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효과적인 통일교육을 위해 사이버 교육도 확대하고 한국 사회의 각 계층을 직접 찾아가는 현장교육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1994년 7월 입국한 그는 초창기 탈북자 가운데서는 매우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김일성종합대 교수 출신의 엘리트답게 그는 입국 이후에도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물론 초기엔 한국 사회에서 느낀 탈북자라는 딱지 때문에 보이지 않는 눈물도 흘렸다. 하지만 북한연구자로서 활발하게 방송에 출연하고 언론에 기고하면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1959년생인 그는 북한의 내각 간부였던 아버지와 러시아어 번역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간부 자제만 다닐 수 있는 남산고등중학교를 거쳐 김일성종합대를 다닌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고교·대학 후배’이기도 하다.
그는 김일성종합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중국으로 유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지만 좀 더 많은 자유를 느낀 순간 북한에서 받았던 특혜는 초라한 껍데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가 그만큼 소중한 가치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2004년 한 기고문에서 “남한의 방송과 언론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가 남한 방송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17세이던 1975년 1월. 북한 고위층과 그 자제들만 다니는 평안남도 용강군 온천요양소에서 후배 덕분에 남한 라디오방송을 들었다. 당시 군사독재자라던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생중계를 듣던 그는 대통령이 직접 방송에 나와 기자들의 자유로운 질문에 답하고 대화하는 것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2000년 2월 대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시절 중국 출장에 나섰다가 괴한에게 납치되기도 했다. 하지만 감시 중이던 중국동포와 격투를 벌인 뒤 극적으로 탈출했다. 중간에 몸값으로 송금했던 돈은 송금계좌 인출 정지를 요청한 뒤 돌려받았다. 그는 당시 납치범들이 몸값을 요구했을 때 “그들이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는 생각에 오히려 한숨을 돌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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