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육 씨(76)는 1950년 7월을 잊지 못한다. 검은 지프를 타고 나타난 북한 정치보위부 직원 2명이 부친 김상덕 전 의원(반민특위 위원장)을 그의 눈앞에서 끌고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이니 잠시 모시겠다”고 했지만 그날 이후 부친을 만날 수 없었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읜 김 씨는 납북된 부친과 헤어진 뒤 전국을 떠돌았다. 부친이 월북인사로 분류돼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기도 힘겨웠다. 일용직 노동자 생활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마흔 살 늦은 나이에 결혼했지만 곧 아내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그는 동아일보 보급소에서 일하며 아내의 병원비를 댔다. 1990년 뒤늦게 부친이 국가유공자 서훈을 받을 때까지 정부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박오복 씨(72)의 형 박봉식 씨는 1950년 7월 1일 북한군에 납치됐다. 박 씨는 “북한군이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강원도 홍천에서 농사를 짓던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갔다”며 “형의 생사라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의 납북으로 고통받아온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정부가 6·25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파악된 민간인 55명을 처음으로 전시납북자로 인정한 것이다. 김황식 국무총리는 2일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를 열어 이같이 결정하고 “앞으로 납북과 관련한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전시납북자로 인정된 55명에는 김상덕 전 의원 등 제헌 국회의원 6명과 공무원, 법조인, 농민, 자영업자, 학생 등 다양한 직업군이 포함됐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결정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개인별 보상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며 “가족에게 결정 사실을 통보하고 납북자의 생사가 확인되면 가족관계등록부도 정정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전시납북자가 10만 명을 웃돌 것으로 추산하고 앞으로도 납북피해자 심사를 계속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북한 측과의 협의를 통해 이들의 생사 확인과 이산가족 상봉, 유해 송환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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