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26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한 한 장의 사진. 동북아 인종으로 보이는 일군의 사람이 유니폼을 입은 미얀마 현지 기술자들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다. 사람마다 손에 든 도면은 이들이 엔지니어임을 가늠케 한다. 사진을 공개한 스웨덴 출신의 아시아 지역 전문기자 베르틸 린트너 씨는 사진 속 사람이 북한과 미얀마의 기술 관료들이며, 북한 당국자들은 2005년 11월 이전한 미얀마의 새 수도 네피도에서 진행 중인 지하시설 구축 작업에 굴착 기술을 지원하려고 현장을 방문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린트너 기자는 2006년 6월 무렵 몇몇 해외 정보기관이 북한의 땅굴 전문가 팀이 네피도에 곧 도착할 것이라는 무선통신을 감청했다고 밝혔다. 훗날 입수한 문제의 사진은 현지 정부 영빈관에서 촬영한 것으로 시점이 정확히 일치했다. 린트너 기자는 ‘주간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현지 외교 당국자들은 물론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했던 전직 미얀마 군 관계자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확인했다”고 말했다(상자기사 참조).
미얀마 새 수도 네피도 지하시설 구축
그는 사진을 입수한 후인 2009년 6월 ‘아시아타임스’와 미국 예일대 세계화연구센터의 온라인저널 ‘예일글로벌’ 등에 관련 내용을 기고했다. 1988년 쿠데타로 집권한 미얀마 군부가 국내의 민주화 소요나 미국 등 외부의 정밀타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은신처를 마련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은 외화벌이를 하려고 이들의 지하시설 건설에 도움을 줬다는 것. 그는 옛 수도 양곤에서 북쪽으로 460km가량 떨어진 네피도는 물론, 동부 샨주(州)의 주도인 타웅지에도 지하시설을 조성했다고 전했다.
북한이 미사일이나 핵 물질 관련 기술, 위조지폐나 가짜 담배 등을 통해 외화벌이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휴전선 일대에서 축적해온 땅굴 기술 노하우를 해외에 수출하는 것은 평양으로선 와전히 새로운 방식의 외화벌이인 셈이다. 린트너 기자는 미얀마 군부가 그 대가로 북부 강변 지역에서 생산하는 금이나 광물, 식량 등을 제공했을 공산이 크다고 분석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은 부시 행정부가 ‘불량국가’ 혹은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용어를 써가며 북한과 미얀마를 공격적으로 비판하던 시기다. 당시 미국 행보가 양국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었을 소지를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미얀마는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북한과 국교를 단절했지만,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1990년대부터 비밀접촉에 나섰다고 린트너 기자는 분석했다. 땅굴뿐 아니라 다양한 차원에서 북한의 기술과 미얀마의 천연자원을 교환하는 협력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헤즈볼라 땅굴
2003년 6월에는 북한 기술자들이 양곤의 정부 영빈관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직후 북한제 자주포와 방사포가 미얀마 군에 배치된 사실이 확인됐다. 2004년에는 북한 기술자 300여 명이 미얀마의 지대공미사일기지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는 정보를 미국 측이 입수하기도 했다. 2010년 12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외교전문이 “미얀마 군부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 정글 지역에 핵 시설 및 미사일기지를 건설하는 중이다”라고 적시한 근거다. 두 나라는 2007년 4월 외교관계를 공식 복원했으며,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2010년 7월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미얀마가 북한의 도움을 얻었다는 정황을 포착, 예의주시하는 중”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린트너 기자는 북한이 동남아뿐 아니라 중동 지역에까지 땅굴 기술 수출에 나섰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06년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군과 교전하던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도주하면서 버리고 간 지하시설이 휴전선에서 발견한 북한의 땅굴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는 것. 지하 40m 깊이에 만든 이들 갱도는 이스라엘 국경에서 100m 남짓 떨어진 곳까지 뚫려 있는데, 풀로 은폐해놓은 땅굴 속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전기와 환기 시설은 물론, 화장실과 샤워시설까지 갖춘 넓은 방으로 연결되는 복합 구조다.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기술 수준을 자랑하는 이 은닉 땅굴은 당시 이스라엘 정부와 유엔이 발견해 그 실체를 공개했다.
관련 기사를 통해 린트너 기자는 “(미얀마의 경우와 달리) 북한이 헤즈볼라의 지하시설 건설에 관여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라면서도 “서방으로 망명한 이란 혁명군수비대 출신 전직 고위간부가 ‘이란 기술자와 북한 전문가 덕분에 헤즈볼라가 남부 레바논에 25km에 달하는 지하통로를 만들 수 있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그는 “헤즈볼라가 시리아 또는 이란을 통해 입수한 북한의 땅굴 설계도와 청사진을 재활용했을 소지도 있다”는 레바논 현지 소식통의 이야기도 소개했다. 시리아와 이란은 오랜 기간 북한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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