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재·보궐선거에서 젊은 세대의 성난 민심을 확인해 놓고도 한나라당이 특유의 ‘웰빙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 패배 후 이틀이 지난 28일에도 말로만 쇄신을 외칠 뿐 속으로는 뼈를 깎는 자기반성 없이 각자 살 길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날 이명박 대통령은 ‘선(先) 민심수습-후(後) 인적개편’이라는 방향을 제시했지만 여권 내부에서조차 “안이한 대응”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당청 모두 ‘오감(五感) 마비’, 즉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 ‘무개념’ 한나라당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번 재·보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정확히 읽어야 하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인상이 짙다. 홍준표 당 대표가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다”라며 애매한 화법으로 책임론을 비켜가려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으로 상징되는 구 정치질서가 새로운 비판세대에 패한 것이지만 홍 대표는 애써 기초단체장 선거 8곳에서의 승리를 거론하며 마치 무승부로 끝난 것처럼 설명했다.
이날 한나라당 의원총회에 등장한 꽃다발은 한나라당의 현실 인식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비상대책을 논의하기로 한 의총장에서 기초단체장 당선자 8명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원희룡 최고위원은 의총 후 기자들과 만나 “쇄신을 논해야 할 자리에서 귀순용사 환영식도 아니고 정치적 쇼”라며 “당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이미 정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변화의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며 “당연히 지도부부터 모범을 보여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 자발적 희생이 안 되면 타의에 의해 퇴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의총엔 의원 137명이 참석했지만 발언자는 단 7명에 그쳤고 치열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내에서는 홍 대표 체제의 유지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는 기류가 감돌았다. 홍 대표가 물러난다면 전당대회 2위 득표를 한 친박(박근혜)계 유승민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거나 새롭게 전당대회를 열어야 한다. 그러나 친박 진영에서는 유 최고위원의 전면 등장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당 개혁을 외치던 소장파 역시 “대안이 없다”며 침묵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 목을 맨 상당수 현역 의원들은 오히려 홍 대표 등 지도부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더 신경 쓰는 눈치다. ▼ 말로만 “비상”… 與 의총, 당선자 꽃다발 잔치 ▼
○ 민심 수습 원론만 반복하는 청와대
이 대통령은 전날 밤 빚어진 임태희 대통령실장의 사의 표명 파문을 ‘없던 일’로 정리했다. “젊은이의 고통을 해결할 대책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며 ‘선 민심수습’을 강조한 것이다.
이를 놓고 민심 수습의 가장 중요한 방책 중의 하나가 인적 쇄신인데도 이 대통령이 또다시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늘 그랬던 이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라면서 “국민에게 앞으로 전개될 변화를 효과적으로 예고하는 데 실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 내에서도 “사람 바꾸는 게 능사가 아니다”는 의견도 있지만 “단호하고 결연한 대응이 필요한 때”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여권의 한 인사는 “임 실장이 한 달 정도 업무를 마무리한 뒤 결국 물러날 것”이라고 해석했다. 반면 또 다른 인사는 “임 실장이 스스로 정치적 판단을 내릴 기미가 있다. 이번 주말이 고비다”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선 민심수습’ 방안과 관련해 전체 서울 유권자 가운데 한나라당에 반대표를 던진 25.8%(투표자 가운데는 53.4%)보다는 ‘투표하지 않은 50%’의 존재에 주목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중간지대 유권자의 표심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권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 이반의 근원적 처방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 그들만의 권력게임
사정이 급박한데도 여권 핵심부에선 임 실장 사의 표명을 놓고 암투가 벌어졌다는 관측이 나왔다.
10·26 선거 이전부터 ‘물러날 때’를 이 대통령과 상의해온 임 실장은 ‘연말 이전 사퇴’를 전제로 후임자 구상도 해 왔다는 후문도 있다. 하지만 서울시장 선거 패배라는 변수가 발생하면서 27일 ‘책임을 진다’는 메시지를 이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27일 저녁 ‘임 실장 사의표명’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자 청와대 내부에서는 일제히 주류에서 비주류로 밀려난 이재오 전 특임장관 주변을 유출자로 지목했고, 이 장관측은 펄쩍 뛰며 부인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임 실장의 사의 표명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쪽은 의외로 홍 대표였다. 그는 27일 임 실장과의 저녁 자리에서 관련 보도를 접하고 “청와대는 선거 패배의 책임이 없다”며 강하게 사퇴를 만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 일각에선 즉각 청와대 2인자의 사퇴가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여권 핵심부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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