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2월 16일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앞두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야당인 한나라당 지도부는 모두 ‘찬성 당론’을 정했다. 그러나 찬성 당론에도 불구하고 투표 결과 출석 의원 234명 중 71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특히 반대 의원 중엔 한나라당 의원도 31명이 포함돼 있었다. 아예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한나라당 의원도 18명이었다. 》 이들은 대부분 농촌 지역 의원으로 한-칠레 FTA 비준안이 통과되면 농촌 피해가 막대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박희태 국회의장과 권오을 국회 사무총장, 김성조 기획재정위원장을 포함해 한나라당 송광호 정병국 의원 등이 당시에 반대표를 던졌다. 한나라당 소속 40여 명이 참여한 ‘농어촌의정회’는 한-칠레 FTA 체결을 반대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박 의장이 당시 농어촌의정회 회장이었다.
7년 9개월가량 지난 요즘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앞두고는 한나라당 소속 농촌 지역 의원들의 공개적인 반대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야당과 협상을 더 해야 한다는 협상파에 수도권 지역구 의원이, 야당과의 협상은 무의미한 만큼 표결처리를 해야 한다는 강경파에 지방 의원이 더 많이 분포할 정도다.
무엇보다 오랜 기간 농촌 대책이 마련되면서 농민들의 조직적 반발이 크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한-칠레 FTA 표결 때 반대표를 던진 이인기 국회 행정자치위원장은 “한-칠레 FTA 때는 농촌에 대한 지원이 부족했지만 지금은 100% 만족할 수준은 아니라도 지원 대책이 충분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며 “전국농민회총연맹을 제외한 다른 농민단체들은 조직적인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야정은 지난달 30일 한미 FTA 농어업 피해보전대책으로 13개 안에 합의했고 내년도 예산안 반영과 관련 법률안 개정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한-칠레 FTA 때는 순수하게 경제논리로 찬반이 나뉘었기 때문에 손실을 보는 농촌 지역이 똘똘 뭉쳐 반대했다. 하지만 한미 FTA의 경우 국가 전체의 통상정책 비전과 반미와 같은 이념적 논란이 뒤섞여 전선이 흐트러진 측면도 있다. 영남의 한 재선 의원은 “한미 FTA는 시장자본주의와 대외무역정책, 한미동맹 등 보수정당의 근간과 얽혀 있어 보수정당의 구성원으로서 한미 FTA를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당론으로 찬성 의견을 정해주는 게 농촌 지역 의원들의 부담을 덜 수 있다”고 말했다.
한-칠레 FTA 때는 전례가 없어서 FTA 체결 이후 농촌에 불어 닥칠 개방의 물결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만 여러 국가와 FTA를 맺으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는 점도 달라진 부분이다. 영남의 또 다른 의원은 “한-칠레 FTA가 통과되면 쑥대밭이 될 것이라고 했던 포도농사도 건재하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FTA에 대해 수동적인 의견보다 무역, 교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로선 불가피한 길이라는 여론이 커졌다”고 말했다.
내년 공천을 앞두고 의원들이 당론을 어기고 반대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는 점도 있다. 한 중진 의원은 “한-칠레 FTA 때도 당 지도부가 찬성 당론을 어길 경우 공천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언했지만 그때는 일부 농촌 지역 의원이 반대해도 비준안 처리 자체엔 문제가 없었다”면서 “한미 FTA를 놓고 여아가 첨예하게 대치하는 상황이라 당론을 어기기가 어려운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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