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동아일보
오피니언
정치
경제
국제
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헬스동아
트렌드뉴스
통합검색
언어선택
방문하고자 하는 언어의 홈페이지를 선택하세요.
한국어
English
中文(簡体)
日本語
마이페이지
전체메뉴 펼치기
정치
‘정치인 박태준’ 누구인가
동아일보
업데이트
2015-05-22 15:05
2015년 5월 22일 15시 05분
입력
2011-12-13 17:35
2011년 12월 13일 17시 35분
코멘트
개
좋아요
개
공유하기
공유하기
SNS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공유하기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URL 복사
창 닫기
즐겨찾기
읽기모드
뉴스듣기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가
가
가
가
가
창 닫기
프린트
유명을 달리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포항제철 신화를 이룩한 '철의 사나이'일뿐 아니라 '정치인 박태준'으로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4선(11, 13¤15대) 국회의원에 구 민정당 대표위원, 구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에 이어 제32대 국무총리 등이 그가 남긴 정치적 흔적이다. 다만 그의 정치 역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박 명예회장은 육사 6기 출신으로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잠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박 명예회장은 대한중석사장을 거쳐 1968년 포항제철 사장을 맡아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신념으로 불모지였던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박 명예회장이 정계에 본격 입문한 계기는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서 참여한 데 이어 1981년 11대 전국구 의원(민정당)으로 당선되면서부터다.
포항제철 회장을 유지하면서 박 명예회장은 11, 13, 14대 등 3선 경력을 쌓았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에 오르며 정치 전면에 섰다.
그러나 민정당 대표 취임 후 며칠만에 이뤄진 `3당 합당' 이후 시련을 맞았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악연 때문이다.
박 명예회장은 `3당 합당'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밑에서 최고위원직을 맡았으나,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의 대통령선거 공약화를 요구하다 YS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14대 대선 직전인 1992년 10월 민자당을 탈당했고,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더 큰 난관에 직면했다. 같은 해 3월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그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97년 5월 포항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4년여의 '망명생활'을 해야 했고, 같은 해 7월 포항 북구 보선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1997년 9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의 이른바 '도쿄 회담'을 계기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에 합류한 뒤 야당 후보 단일화 협상이 타결되자 같은해 11월 자민련 총재직에 취임했다.
자민련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입지가 강화되기는 했지만, 자민련의 목표이자 'DJT (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의 연결고리였던 내각제 개헌이 유보되는 좌절감도 맛봐야 했다.
영욕을 거듭한 끝에 박 명예회장은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 1월 '새천년 첫 총리'로 발탁됐다.
박 명예회장은 총리 취임과 동시에 `경제 총리'로서 의욕을 불태웠지만, 불과 4개월 만에 낙마해야 했다.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자 사퇴한 것이다.
총리직 퇴임 이후 박 명예회장의 정계 복귀 가능성이 꾸준히 점쳐졌지만,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끝내 현실 정치를 외면했다.
디지털뉴스팀
좋아요
0
개
슬퍼요
0
개
화나요
0
개
댓글
0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등록
지금 뜨는 뉴스
파월의 입에 쏠린 시장의 눈… 美·日·英·中 통화정책 회의 개최[D’s 위클리 픽]
“바퀴벌레 먹으며 버텼다”…태평양 표류 95일 만에 구조된 페루 어부
트럼프 “우크라군 목숨 살려달라” 푸틴 “항복하면 보장”
좋아요
0
개
슬퍼요
0
개
화나요
0
개
0
닫기
댓글
0
뒤로가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