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조업 중이던 중국 어민의 한국 해양경찰 살해사건을 놓고 정작 가해자인 중국 정부는 ‘고자세’, 피해자인 한국 정부는 ‘저자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만 존중할 뿐 주변 국가들을 무시하는 듯한 중국 정부의 오만한 ‘중화(中華)주의’ 외교 행태를 두고 비난 여론이 거센 가운데 한국 정부의 고질적인 ‘사대(事大) 무기력증’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해경 특공대원 고 이청호 경사(40) 피살사건 하루 만인 13일 낮 12시 반에서 오후 1시 반 사이 베이징(北京) 소재 한국대사관에 새총 또는 공기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직경 7mm 안팎의 은색 쇠구슬이 날아들어 대형 강화 유리창이 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를 본 곳은 대사관 내부 경제동(棟) 1층 남쪽 코너에 있는 직원 휴게실로 약 5mm 두께의 대형 강화 유리창에 작은 동전 크기의 구멍이 뚫렸으며 구멍 주위로는 방사형으로 길게는 1m가량의 금이 10여 개 생겼다고 주중 한국대사관 측은 밝혔다.
망치로 쳐도 파손되기 쉽지 않은 강화 유리가 손상될 정도로 파괴력이 강했던 만큼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대사관 측은 판단하고 있다. 1992년 주중 한국대사관 개관 이래 공격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외교부는 14일 오전 이 사건이 언론에 먼저 보도된 뒤에야 피해사실을 공개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청와대에 온 첫 보고시점도 14일 오전”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 참모들도 사건 발생 24시간이 지난 이날 점심 무렵까지 한중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는 이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중 대사관이나 외교부가 늑장 보고를 했거나 우리 정부가 중국을 의식해 보고를 받고도 쉬쉬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외교부는 “13일 주중 대사관으로부터 구두 보고를 받았고, 14일 전문으로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 中 앞에만 서면 기죽는 한국 외교… 中 무례 외교 키웠다 ▼
이번 해경 살해사건을 포함해 중국 정부는 시종 ‘무례 외교’를 반복해 왔다.
중국 외교부 류웨이민(劉爲民) 대변인은 해경 살해사건이 나고 하루가 지난 13일에야 “불행한 사건이다. 한국 해경이 숨진 것에 유감의 뜻을 표시한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따른 것이었고, 유가족에 대한 조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부산 사격장 화재로 숨진 일본 관광객, 한국인 남편의 폭력으로 숨진 베트남 신부를 위해 한국 외교부가 빈소를 찾아 위로한 것과 극명히 대비된다. 10월 중국 어민의 흉기 난동으로 최루탄을 터뜨리면서 진압했을 때 중국은 “한국의 ‘문명적인 법 집행’(文明執法·문명집법)이 필요하다”는 어처구니없는 논평을 냈다.
이런 중국의 고압적 자세의 배경에는 자신이 상대해야 할 강대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한국 외교관의 태도가 깔려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명박 대통령은 수차례에 걸쳐 “우리 외교관들이 워싱턴과 베이징을 상대할 때 네트워크를 맺는 데만 매달려서야 되겠느냐”며 ‘관계 우선-전략 나중’ 행태를 지적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여권 핵심관계자의 설명이다.
한중 양국의 비대칭적 외교관계는 단적으로 양국 대사의 격(格)에서부터 알 수 있다. 장신썬 주한 중국대사는 부임 직전에 외교부 판공청 주임을 역임한 국장급 인사다. 반면 이규형 주중 한국대사는 외교차관을 지낸 장관급(14등급) 외교관이다. 전임 류우익 대사는 대통령실장을 지냈다. 중국은 지난해 주북 중국대사로 차관급을 임명해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지난해엔 천안함 폭침 등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도 자국 이익을 따지느라 과학적 진실은 외면한 채 일방적인 북한 감싸기로 일관했다. 연평도 포격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이 중국 외교부에 면담을 요청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은 일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해경 살해 및 쇠구슬 피격 사건이 알려지자 트위터 등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에선 “사람이 죽어도 쉬쉬했는데 그깟 쇠구슬 따위야”(s5414)라는 냉소부터 “진저리가 처진다. 이건 대한민국에 총을 쏜 것이다. 주권은 이미 침해당한 게 확실하다”(JeonInSeong) 등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4일에도 보수단체의 항의시위는 계속됐다. 한국자유총연맹 회원 200여 명(경찰 추산)은 서울 종로구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해경 살해한 중국 해적 조업 만행 규탄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어 오후 2시에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전날에 이어 중국대사관 앞에서 다시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전날처럼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에 불을 붙이거나 대사관에 계란을 던지지는 않았다.
내년 1월로 추진해 온 이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여권 고위 인사는 “중국 정부의 오만함으로 나빠진 민심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과연 정상적으로 방중이 성사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류 대변인은 한국 여론이 심상치 않자 “사건의 추이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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