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국회 의‘死’당… 직권상정 97건 불명예 신기록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7일 03시 00분


총선체제 급급… 예산안 표류

국회가 24일째 개점휴업 중이다. 지난달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과정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며 국제적 망신살이 뻗친 이후 줄곧 ‘자체 휴가’ 상태다. 불법 조업 중국 어선을 단속하던 해경 특공대원 이청호 경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인 13일 국토해양위원회가 긴급 전체회의를 열어 해경 측 보고를 받고 중국 정부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게 유일한 국회 활동이다.

국회가 태업에 들어가면서 내년도 예산안의 법정 처리시한(12월 2일)은 보름이나 지났다. 9년째 국회가 헌법을 위반했지만 여당이든 야당이든 국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미 FTA 후속대책, 국회 폭력방지법, 내년 총선 선거제도 개선 등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할 사안이 산적해 있지만 정치권의 관심은 온통 내년 총선과 대선뿐이다.

매일같이 여당은 쇄신한다고 싸우고, 야당은 통합한다고 다투면서 국정은 설 자리를 잃었다. 최악의 ‘폭력 국회’로 낙인찍힌 18대 국회가 임기 말 최악의 ‘태업 국회’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될 판이다.
▼ ‘대립→직권상정→폭력’ 반복… 최악 국회 ▼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는 1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주말에라도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를 만나 등원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15일 두 사람은 비공개 회담을 열었지만 12월 임시국회 일정에 합의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등원 조건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DDoS·분산서비스 거부) 공격 사건 특별검사제 실시 △한미 FTA의 핵심 쟁점이었던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폐지 결의 등 8가지를 내걸었다. 이에 황 원내대표는 “상임위를 열어 논의하면 될 문제를 미리 합의하자는 것은 위헌적 발상”이라며 조건 없는 등원을 요구하고 있다.

얼음 국회 한파주의보가 발효된 1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 근처 올림픽대로변 펜스에 커다란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지난달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이후 꽁꽁 얼어붙은 국회를 대변하는 듯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얼음 국회 한파주의보가 발효된 1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 근처 올림픽대로변 펜스에 커다란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지난달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이후 꽁꽁 얼어붙은 국회를 대변하는 듯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여야가 계속 헛바퀴 돌듯 따로 가면서 정치권에선 사상 초유의 준예산 편성 사태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한나라당의 핵심 관계자는 “민주당이 통합 작업을 끝마친 뒤에야 등원할 가능성이 있다”며 “정부가 준예산을 편성한 뒤 내년 1월 초에 예산안을 처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는 1월 15일 열린다.

그렇다고 169석의 ‘공룡’ 한나라당이 예산안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동력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국회 폭력’을 재연할 수 없는 데다 19일 박근혜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의 전면에 나서는 상황에서 예산안 단독 처리를 첫 정치행보로 내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미 18대 국회는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 18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 없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통해 처리된 의안은 한미 FTA 비준동의안까지 합쳐 총 97건에 이른다. 17대 국회에선 직권상정 처리 의안이 29건, 16대 국회에선 5건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직권상정 처리 의안이 가장 많았을 때는 15대 국회(87건)였다. 18대 국회는 임기를 5개월여 앞두고 이미 역대 최고 기록을 넘어섰다.

특히 18대 국회의 직권상정 처리 의안 가운데 36건(37%)은 상임위조차 통과하지 않은 의안이었다. 상임위에서부터 여야가 불통과 대립의 정치를 해왔다는 얘기다.

18대 국회가 최악의 ‘상극(相剋) 정치’로 갈등하면서 한나라당은 직권상정을 강행할 때마다 여야 간 쟁점법안을 무더기로 끼워 넣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12월 8일 예산안 처리 때다. 서울대 법인화법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특별법, 아랍에미리트 파병동의안 등 여야가 오랫동안 대립해온 의안들을 예산안과 함께 처리한 것이다. 18대 국회에선 모두 6차례 직권상정을 해 한 번에 평균 16건의 의안을 처리했다.

‘여야 대립→국회 공전→직권상정→국회 폭력’으로 이어진 18대 국회의 고질병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를 불러왔다. 특히 10석도 안 되는 민주노동당(현 통합진보당)은 18대 국회의 추락에 한몫을 했다. 18대 국회에서 첫 번째 직권상정 사태를 부른 2008년 12월 감세법안은 애초 민노당을 제외한 여야가 본회의에 상정하기로 합의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민노당의 실력행사로 법제사법위원회 심의가 파행을 빚으면서 한나라당은 직권상정 수순을 밟았다. 올해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 때도 민노당은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을 봉쇄해 여야 간 논의 자체를 막았다.

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의회학회(회장 강장석 국민대 교수) 창립학술대회에서 ‘의회정치의 위기’를 발표한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교수는 “흔히 여소야대 상황에서 대통령과 국회가 더 많이 충돌할 것으로 가정하지만 실제로는 집권당이 다수당일 때 국회의 여야 협의 운영이 파괴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이어 “단임제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은 항상 자신의 공약사항을 집행하기 위한 가장 빠른 경로를 채택하고 싶어 하지만 의안의 상정 단계부터 야당의 동의를 구하는 의회의 운영원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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