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대표 경선이 ‘돈봉투’로 얼룩졌다면 새 지도부 출범 이후 이뤄진 당직 인선이나 각종 선거에서의 공천 역시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추악한 ‘돈 선거’ 파문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한나라당 고승덕 의원이 ‘300만 원 돈봉투’ 의혹을 제기한 후 2008년 한나라당 7·3 전당대회에서 금품이 조직적으로 살포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야당에서도 전대나 원내대표 경선에서 금품이 오갔다는 증언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10·26 재·보궐선거로 시작된 정당정치의 위기가 그야말로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돈 선거’ 파문 속에 4·11 총선을 앞두고 진행되는 여권의 쇄신과 야권의 통합 논의도 빛이 바래고 있다. 이제는 인적 쇄신이나 정책 쇄신을 넘어 정당의 운영구조 자체를 바꾸는 ‘구조 쇄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나라당 권영세 사무총장은 8일 기자들을 만나 “당이 (급류에) 떠내려가게 생겼다”며 침통해했다. 고 의원이 3일 동아일보 종합편성채널인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해 돈봉투 문제를 밝히면서 촉발한 돈 선거 파문의 후폭풍이 어디까지 휘몰아칠지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당 대표나 원내대표 등 핵심 지도부가 돈을 뿌려 당선됐다면 관련자들은 ‘선거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권 사무총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낡은 정치와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며 “돈봉투 사건과 관련된 인사라면 공천을 줄 수 없다. 어느 분야에서 비리가 터지든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를 지탱하고 있는 정당의 권위와 공천의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진 점을 의식한 발언이다. 게다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갈릴리교회 목사는 비례대표 공천 과정에서도 돈이 오갔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9일 열리는 비상대책위 전체회의에서는 돈봉투 파문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 문제도 논의할 예정이다.
그렇다고 날개 없이 추락하는 한나라당을 보며 야당이 반색할 처지도 아니다.
통합진보당 유시민 공동대표는 6일 “(민주통합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 시절) 금품 살포를 목격한 바도, 경험한 바도 있다”며 “당의 지도부가 되려고 하면 권력이 따라오니 부정한 수단을 쓰려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대의원을 돈으로 지명했던 것이 반세기 동안의 일”이라고 말했다. 야당도 돈 선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이다.
이번 파문을 촉발한 고 의원도 지난해 12월 한 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야당에 들어간 어느 의원에게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이유를 묻자 ‘공천 받을 돈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호남에 시장·군수 무소속 출마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비공식 ‘공천헌금’ 때문이라고 보도되기도 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즉각적인 수사 의뢰라는 강수를 둔 한나라당과 달리 ‘모르쇠’ 전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8일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차떼기당’의 본색을 버리지 못하고 뼛속까지 썩었다는 것부터 사과해야 한다”고 맹공을 퍼부었지만 정작 민주당 관련 의혹에는 침묵했다. ○ 인적 쇄신을 넘어 구조 쇄신으로
검찰의 돈봉투 수사가 한나라당에 엄청난 인적 쇄신의 후폭풍을 몰고 올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2004년 ‘차떼기당’의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당사를 팔고 천막으로 들어갔듯 이번에 전당대회 금품 살포 이미지를 뛰어넘으려면 간판 인물을 모조리 교체해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돈봉투와 관련된 인사는 물론이고 각종 비리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낙천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인적 쇄신이 당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란 지적이 많다. 매번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현역 의원의 40%가량이 바뀌었지만 금권 선거와 줄 세우기, 계파 갈등 등 정당 내부의 온갖 병폐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공천권과 각종 당직 인선권을 핵심 지도부 몇 명이 틀어쥔 구조 속에서는 내부 구성원이 아무리 달라져도 체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에 있는 소수가 당내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 자체를 깨지 않으면 인적 쇄신을 아무리 해봐야 부패 시스템은 계속 대물림될 수밖에 없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정치학)는 “당 대표 선거 과정에서 계파가 만들어지고, 네거티브 선거전이 판치고, 금품 선거가 이뤄져왔다”며 “모바일 투표든 뭐든 아무리 새로운 방식으로 전대를 치르더라도 1등이 각종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에서는 어떤 인적 쇄신 노력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 정당에는 당 대표가 없다. 원내대표가 원내 일을 조율하면 그만”이라며 “(한국의 정당은) 원내·외를 총괄하는 당 대표, 의원들의 자율적 판단을 가로막는 강제적 당론, 청와대의 입김이 반영되는 당청협의를 모두 없애야 근본적인 ‘구조 쇄신’이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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