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엔 각각 다른 정당 소속이지만 어릴 때부터 정을 나눈 죽마고우(竹馬故友)들이 있다. 때론 정치적 견해차로 얼굴을 붉힐 때도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이거나 선후배, 대학 시절 ‘절친’인 다음 세 쌍의 수십 년째 이어지는 우정 스토리는 삿대질과 폭력으로 얼룩진 정치권에 훈훈함을 선사한다. 설을 앞두고 상대 당 친구나 선배에게 마음을 담아 띄운 편지를 소개한다. 》 ● 한나라 주성영 의원이 민주당 김부겸 의원에게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왼쪽)과 민주통합당 김부겸 의원.
부겸이 형!
제가 사법연수원 다닐 때(1988년) 형은 총선에 출마했지요. 그다지 큰 당이 아니어서 지금은 형이 출마했던 당 이름도 기억이 안 나지만, 나는 형을 돕기 위해 당시 대한상공회의소에 다니던 (고교)동기 권오을(전 국회 사무총장)과 함께 선거홍보물을 들고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공무원 신분인 사법연수원생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는데도, 형이기 때문에 불법선거운동을 감행했습니다. 그만큼 형은 제게는 ‘우상’이었어요. 그때 형은 “우리 성영이, 오을이 신세를 꼭 갚아야 하는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고교 때 학생회에서 알게 된 형과 제가 벌써 50줄이 됐네요. 운동장에서 함께 아침운동을 하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은 그 시절 그대로인데…. 형은 후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장부였습니다.
4월 총선 때 대구에 출마한다지요? 형이 속한 당에 여기는 험지여서 제 마음이 무겁고 저립니다. 오늘 저녁 대구에서 형의 동기 선배들과 만났는데 다들 “부겸이가 죽으러 오는구나”란 말을 합디다. 형이 죽으러 온다는데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8년 전 큰 명분을 내걸고 대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하자 곧장 돌아간 조순형 의원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 선전해 주길 바랍니다. 형의 행동은 큰 의미가 있고 역사가 평가할 겁니다. “역시 김부겸”이란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주 의원(대구 동갑)은 김 의원의 경북고 1년 후배다. 이들은 성균관대에 합격했다 재수를 해 각각 고려대 법대,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경기 군포 3선 의원인 김 의원은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고향인 대구 수성갑 출마를 선언했다. ● 민주 우윤근 의원이 한나라 이정현 의원에게
민주통합당 우윤근 의원(왼쪽)과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사랑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우리가 만난 지 벌써 35년이 흘렀구나. 고교 시절 넌 지금처럼 늘 웃는 얼굴이었지.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비록 내가 국회의원 배지는 먼저 달았지만, 정치 입문은 네가 훨씬 먼저였지. 내가 초선 의원(17대 국회) 시절 너는 비록 소속 당이 달랐지만 만날 때마다 같은 당 동료보다 훨씬 따뜻하게 웃고 격려해줬지. 스스럼없이 내 의원회관 사무실을 찾아 이런저런 조언도 해줬고. 2년 전 동료 의원으로서 같은 상임위(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서 만났을 때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여야 간 싸움이 가장 치열하다는 법사위에서도 너는 변함없는 친구였다. 넌 나를 감싸고 격려하느라 무던히 애를 썼지. 언젠가 우리 당 의원이 “위원장이 여당을 너무 배려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하자 너는 곧장 “위원장한테 예의를 지키라”며 날 지켜줬어. 우리 당 의원에겐 미안하지만 그때 나는 ‘역시 친구가 최고’란 생각에 가슴이 시큰했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구나.
또다시 선거를 앞둔 너와 나. 너로서는 ‘적진’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겠구나. 네 꿈과 목표를 향해 잘 달려갈 것이라 믿는다. 마음으로 응원할게. 정치적으로는 ‘적군’이지만, 우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테니까.
우 의원(전남 광양)과 이 의원은 광주 살레시오고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로 처음 만났다. 현재는 국회 법사위에서 위원장(우 의원)과 여당 위원(이 의원)으로 ‘한솥밥’을 먹는다. 비례대표인 이 의원은 한나라당의 불모지인 광주 서을에 출마한다. ● 통합진보 신창현 부대변인이 민주 오종식 전 대변인에게
민주통합당 오종식 전 대변인(왼쪽)과 통합진보당 신창현 부대변인.나의 벗 종식아.
1989년 3월 대학 입학식 날 처음 만났으니 24년째구나. 대학 강의실과 서클(한국사회연구회)에서 붙어 지내는 것도 모자라 자취를 함께했던 너와 나. 기억나지? 의과대학 뒤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던 보증금 30만 원에 월세 5만 원짜리 단칸방. 고향도 성격도 외모도 달랐지만 ‘촌놈’이란 이유로 친해진 우리들.
너는 늘 내가 갈 길을 닦아주고 열어줬지. 네가 1990년 문과대 부총학생회장 선거에 떨어진 이듬해 내가 문과대 총학생회장이 됐고, 1991년 네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낙선한 이듬해 내가 총학생회장이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정치권에서도 네가 먼저 대변인을 했으니, 또다시 나는 너를 쫓아가는 모양새가 됐구나. 지난해 말 국회 등원을 결정한 민주당을 비판하는 논평을 쓰게 됐을 때 머릿속엔 너부터 떠오르더구나. 우리 당엔 좀 미안하지만 되도록 덜 감정적인 표현을 찾기 위해 고민을 했었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 있던 너와 노동운동을 하던 나는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등을 놓고 많이도 싸웠지. 가는 길은 다르지만, 언제든 소주 한잔 기울일 수 있는 네가 고맙고 든든하다. 세월이 가더라도,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우리의 오랜 우정 지켜나가자.
43세 동갑내기 두 사람은 고려대 언어학과 89학번 동기다. 오 전 대변인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선 후보 캠프를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신 부대변인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대변인, 인천 남동공단노동자권리찾기운동본부 대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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