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겨냥 靑-한나라까지 “경제 민주화” 기치
하도급 혁신-총수 사면제한 등 규제안 쏟아내
재벌 문제가 올해 양대 선거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야권은 물론이고 여권과 청와대마저 재벌행태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면서 재벌개혁의 물결이 거세지는 양상이다. 4·11총선을 겨냥한 여야가 ‘경제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재벌개혁 방안을 쏟아내면서 ‘다음 정권 재벌정책은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 더 왼쪽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재계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경제계에서는 1980년대 말 노태우 정부 당시 정치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1차 재벌개혁과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재벌에 책임을 물으며 추진했던 2차 재벌개혁에 이어 13여 년 만에 재벌개혁의 물결이 다시 시작됐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 등 대기업들은 빵집 등 비판받던 일부 사업의 철수로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일감 몰아주기, 담합, 동네 상권 진출 등 명백하게 부당한 행위나 사회적 질타를 받을 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사업에서 손을 떼거나 자정노력을 밝히며 서둘러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시장에 모든 걸 맡길 수 없고, 정부가 개입해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경제관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찾아온 재벌개혁의 물결을 대기업들이 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의 변화가 한국 경제에 가져온 변화의 폭을 감안할 때 2012년부터 시작된 3차 재벌개혁 바람은 다시 한 번 한국경제 시스템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 선거의 해… ‘재벌 프렌들리’는 없다 ▼
○ 여야 가릴 것 없이 재벌개혁 기치
한나라당은 27일 당의 정강·정책에 헌법에 명시된 ‘경제 민주화 실현’을 넣기로 하고 구체적인 재벌개혁 방안 마련에 나섰다. 민주통합당이 4월 총선의 핵심 공약으로 재벌개혁 내용을 담은 ‘경제민주화’를 제시하기로 한 데 이어 한나라당 역시 재벌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설 뜻을 밝힌 것이다.
한나라당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제어하던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 폐지의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한 공정거래법 개정을 비롯해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대기업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폐해 방지, 하도급 제도 전면 혁신 등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재벌 총수의 특혜 축소를 위해 대기업 총수들의 무분별한 사면을 제한하는 방안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통합당 역시 이날 ‘경제민주화·보편적 복지·부자증세’를 4월 총선의 3대 핵심공약으로 내놓고 재벌개혁에 대한 방안들을 구체화했다. 민주당은 출총제 부활과 일감 몰아주기 처벌 강화 외에 재벌 계열사 간 순환출자 금지, 부당내부거래 규제 강화, 중소기업 적합업종 입법화 등을 제시했다.
여야 모두 재벌개혁 방안의 핵심을 경제력 집중 억제와 총수 일가의 책임강화로 잡고 있다. 김대중 정부 후반부 이후 지금까지 재벌에 대한 직접 규제보다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던 재벌정책의 흐름이 완전히 뒤집히는 셈이다. 여권까지 이런 움직임에 적극 합류하고 나선 이유는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이 기대했던 ‘낙수(落水)효과’(대기업 성장을 촉진하면 과실이 경제 전반에 파급된다는 의미)가 실종된 상황에서 막대한 이익을 낸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이나 영세자영업자들의 사업영역을 침범하는 등 무분별한 확장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대위 정책쇄신분과위 권영진 위원은 “재벌들의 과도한 탐욕이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고 중소기업, 자영업자들의 영역까지 침해하는 것은 공정한 시장이 될 수 없다”며 “그런 관점에서 재벌 대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 계열분리 청구제 도입 목소리도
전문가들은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재벌규제 방안 중 △금융·산업자본 분리 강화 △일감 몰아주기 처벌 강화 △재벌범죄 처벌 강화 등이 재벌의 지배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민주통합당 일각에서 금산분리 강화 방안으로 검토하고 있는 ‘계열분리 청구제’는 파괴력이 클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계열분리 청구제는 시장 지배력이 지나치다고 판단될 경우 법원을 통해 소유 지분을 제한하는 제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대기업 계열 보험, 증권사를 규제하는 방안으로 내놨던 공약이다. 이 방안은 수직계열화나 순환출자 과정에서 총수 일가의 그룹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대기업 금융계열사의 지분을 직접 규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은 정부가 특정 기업에 대해 분할을 요구할 수 있는 기업분할명령제를 도입하고 있다”며 “금산분리 강화를 위해 계열분리청구제가 실제로 도입되면 삼성 등 대부분의 대기업들에 비상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처벌 강화 역시 대기업에는 민감한 문제다. 일감 몰아주기는 지난해 정부의 세법 개정으로 30%를 초과한 계열사 간 내부거래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하는 규제가 도입됐다. 여야는 모두 현재의 정부안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계열사 간 내부거래비율이 30%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일정 금액 이상이면 증여세를 과세하거나 내부거래비율 40% 이상에 대해서는 최대 40%로 돼 있는 증여세 세율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또 수출을 목적으로 한 해외 자회사와의 거래는 내부거래에서 제외하는 예외 규정에도 손을 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럴 경우 국내 43개 그룹의 1083개 계열사 중 40%에 가까운 427개 계열사 내부거래에 대해 증여세가 부과될 수 있다. 일부 시민단체는 부(富) 대물림을 위한 재벌들의 일감 몰아주기를 배임으로 보고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대주주 비리에 대한 가중처벌이나 중소기업 적합업종 입법화, 대기업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강화 등도 대기업의 경영을 제한할 수 있다.
○ 재계 “숨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여야가 한목소리로 재벌정책에 관한한 강도 높은 개혁 드라이브를 공언하면서 누가 총선에서 주도권을 쥐든 재벌 규제는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재벌 규제 수준이 최소한 노무현 정부 때보다 강화될 것은 거의 확실하고, 재벌을 가장 거세게 밀어붙였던 김대중 정부 때만큼 강도가 세질 가능성도 일각에서 점치고 있다.
재계는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곤혹스러워하면서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가 초기 친기업 정책을 펼치긴 했지만 이후 법인세 인하가 기대만큼 이뤄지지 않았고, 임시투자세액공제 폐지 등 기업에 불리한 정책도 적지 않았다”며 “지금으로선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 외엔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박용 기자 parky@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