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철 대변인은 이날 저녁 “진 회장이 ‘사실과 다르게 알려져 억울한 점도 있으나 당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진 사퇴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해왔다”고 밝혔다. 진 회장의 낙마로 공천위는 당분간 10명으로 운영될 예정이며, 진 회장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둘 가능성도 큰 것으로 알려졌다.
진 회장은 ‘국민 눈높이에 맞추겠다’는 취지로 구성된 공천위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달 31일 인터넷 기자단 오찬간담회에서 “평범한 주부였다가 학교 폭력의 피해를 엄마로서 직접 겪고 1만 명이나 되는 엄마들을 모아 패트롤맘을 만들었다고 한다”며 “이런 사람이 국민에게 맞지 않느냐”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 국민 눈높이라던 與 진영아, 눈가리고 아웅 ▼
하지만 도덕성 논란 끝에 진 회장이 낙마하면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할 공천위가 출범도 하기 전에 상처를 입게 됐다. 아울러 2004년 총선 당시 서병문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의 열린우리당 입당 전력과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의 2007년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대선캠프 참여 경력도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를 두고 박 위원장의 지나친 ‘비밀주의’ 인사 스타일이 부실 검증을 자초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보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애초부터 다면적인 검증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박 위원장은 여러 경로로 추천을 받았지만 인선 작업은 이학재 비서실장을 비롯한 최측근 실무진과만 했다.
사퇴한 진 회장은 지난달 31일 내정 발표 직후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정당 활동 경험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9년 6월 한나라당 중앙위 총간사로 임명될 때 직접 작성해 당에 제출한 이력서에는 그의 정치활동 기록이 빼곡히 담긴 것으로 확인됐다.
이력서를 보면 진 회장이 한나라당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5세에 당 여성정치아카데미 부회장을 맡았다. 이어 2002년, 2007년 대선 당시 당 중앙선거대책위에서 각각 여성위원, 언론특보를 지냈다고 기재했다. 그는 2009년 대통령 직속 녹색성장위 위원으로 활동했다고도 보고했다. 하지만 위원 명단에 진 회장은 없었다.
진 회장은 지난해 9월까지도 각계 직능조직과의 교류를 위한 기구인 당 중앙위의 산업자원분과위 대외협력위원, 총간사로 활동하며 당적을 가지고 있었다. 2010년 7월 전당대회 대의원 명부에도 진 회장은 ‘중앙위 주요당직자’로 올라 있다.
그는 이런 논란에 대해 동아일보에 “(중앙위에) 한두 번 정도 나갔으며 (그것도) 모임이 늦게까지 이어져 먼저 돌아왔다”고 해명했다. 당적에 대해선 “8년 전인가 10년 전쯤 잠깐 당원이었다. 지금은 아니다”라고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 다른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선 “당적을 보유했던 사실도, 중앙위 간사로 임명된 사실도 없다”고 말했다.
진 회장은 한나라당 외곽조직인 ‘뉴한국의 힘’ 대변인으로도 활동했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를 외곽 지원한 이영수 회장이 이끄는 단체다. 진 회장을 중앙위에 추천한 인물도 이 회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뉴한국의 힘’에 대해 “뭐하는 조직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진 회장이 오랜 기간 정치권 주변을 맴돌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당의 한 인사는 “(이기택 씨가 이끌던) ‘꼬마민주당’ 인사들과 어울리며 한나라당에 들어왔고, 민주평통과 한국자유총연맹을 통해 이명박 정부 인사들과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친박(친박근혜)계의 한 인사는 “지난해 진 회장이 ‘전국조직을 갖고 있다’며 접근해 왔다”며 “패트롤맘은 전국과 해외에 지부를 둔 사실상 정치조직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당초 ‘40대’ ‘엄마’ ‘자원봉사자’ 등의 특징을 지닌 진 회장을 국민에게 내세울 만한 ‘회심의 카드’로 여겼다. 이 때문에 사태가 불거지자 상당히 당황한 것으로 전해졌다. 권영세 사무총장과 친박계도 1일 박 위원장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고 진 회장의 거취 문제를 논의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권 사무총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이 제대로 못 걸러내 잡음이 나온다면 검증 절차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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