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의 방문객 출입문 셔터가 내려졌다. 회관 밖으로 밀려난 경남 남해군과 하동군 주민 100여 명은 굳게 닫힌 회관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앞서 주민 중 일부는 국회 정치개혁특위 민주통합당 간사인 박기춘 의원실을 기습 점거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회관 곳곳에서 주민과 국회 방호원들이 밀고 당기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국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선거구 획정을 두고서다. 19대 총선을 50여 일 앞두고도 선거구조차 정리하지 못한 초유의 사태 속에 선거구 통폐합 대상 지역주민들의 반발 수위도 거세지고 있다.
15일에는 남해-하동 지역구 의원인 여상규 새누리당 의원과 정개특위 새누리당 간사인 주성영 의원이 볼썽사나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남해-하동은 전국 245개 지역구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어 통폐합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정개특위는 경기 파주와 강원 원주, 세종시 등 3곳의 지역구를 늘리는 대신 영남과 호남에서 지역구를 1, 2석씩 줄이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호남에서 지역구 인구가 가장 적은 전남 담양-곡성-구례 주민들도 하루아침에 지역구가 사라질 판이다. 17일 오전 이 지역 당원 100여 명이 민주당 최고위원회의가 열린 경남 창원시 경남발전연구원으로 몰려간 것도 이 때문이다.
○ 꼼수의 달인들
이런 분란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지난해 11월 민간인들로 구성된 국회 선거구획정위원회는 지역구 8곳을 늘리고 5곳을 줄여, 결과적으로 3석을 늘리는 획정안을 국회에 냈다. 획정위의 의견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공직선거법에서는 ‘국회가 획정위 안을 존중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여야는 처음부터 획정위 의견을 깡그리 무시했다.
당시 새누리당 정개특위 간사는 합구 대상 지역구 출신인 김정훈 의원(부산 남갑)이었다. 이해당사자를 배제한다며 새누리당은 지난달 정개특위 간사를 김기현 의원(울산 남을)으로 교체했지만 김 의원은 합구 대상 지역의 등쌀에 못 이겨 일주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이 과정에서 선거구 획정 논의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획정위가 제시한 합구 대상 지역구와 관련한 논의는 사라진 채 민주당은 ‘지역구별 인구 자료’를 들이대며 영남 3석, 호남 1석을 줄이자고 요구했다. 현재 인구로만 따지면 하위 1∼3위는 영남, 4위는 호남 지역구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새누리당은 ‘시도별 지역구 평균 인구 자료’를 들이밀었다. 현재 전남·북이 지역구별 평균 인구가 가장 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구에 비해 호남의 의석수가 많다는 얘기다. 이를 근거로 새누리당은 영남과 호남의 지역구를 같은 수로 줄이자고 역제안했다.
양당이 서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꼼수’를 쓰는 사이 선거구 획정 데드라인은 세 번이나 지나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구 획정이 안돼 선거사무를 처리할 수 없는 초유의 사태로 가슴을 졸이고 있다. 4·11총선에서 처음 도입된 재외국민선거가 제대로 치러질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 해법은?
여야 간 선거구 획정 협상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은 국민 정서상 국회의원 정원(299명)을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17일 새누리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도 이런 방침을 확인했다. 선거를 앞두고 민심에 역행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더욱이 비례대표 의석 수(현재 54석)도 줄이기 힘들다. 당장 민주당의 ‘후보 단일화 파트너’인 통합진보당의 반대가 심하다.
선관위 관계자는 “헌법에 따라 지역구를 조정하려면 통폐합될 지역구 주민들이 수용할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획정위의 안을 준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획정위가 합치라는 곳은 놔두고 다른 지역구를 손대는 데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획정위의 안대로 하면 △서울 성동 △부산 남 △전남 여수 △대구 달서 △서울 노원에서 1석씩 준다. 이들 지역구는 같은 행정구역 내에서 쪼개진 선거구를 합치는 것인 만큼 주민들의 반발이 상대적으로 약할 것으로 보인다.
획정위가 지역구를 늘리라고 제안한 8곳 중 파주와 원주는 분구 외 다른 방법이 없다. △경기 이천-여주 △부산 해운대-기장도 단독 선거구의 요건을 갖춘 만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공직선거법에서 인구와 함께 행정구역을 선거구 획정의 주요 기준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획정위 안에는 없지만 7월 출범하는 세종시는 광역단체인 만큼 국회의원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모두 5석이 늘어난다.
그 대신 획정위가 분구를 제안한 △경기 수원 권선 △경기 용인 기흥 △경기 용인 수지 △충남 천안을 등 4곳은 같은 기초단체 내에서 선거구를 조정하면 굳이 의석을 늘리지 않아도 된다. 결국 획정위 안을 기초로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하면 5석이 늘고 5석이 줄어 국회의원 전체 정원이나 비례대표 정원을 전혀 손댈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국회 관계자는 “여야 정당의 이해관계와 해당 지역구 의원들의 기득권이 뒤엉켜 이 사달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며 “이번 기회에 국회가 아닌 선관위나 독립위원회에서 선거구를 획정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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