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기념사 ‘위안부 해결’ 촉구… “日, 지금 못풀면 영원히 기회 놓쳐”
위안부 할머니 57명에 선물-편지 “日 사과, 어느 외교현안보다 시급”
이명박 대통령은 1일 3·1절 기념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큼은 여러 현안 중에서도 조속히 마무리해야 할 인도적 문제”라며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강하게 촉구했다.
이 대통령은 “이분들이 마음의 한을 살아생전 풀지 못하고 떠나신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일본이 이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되는 것”이라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을 “미래를 함께 열어갈 동반자”라고 묘사했지만 관심은 지난해 12월 한일 정상회담 이후 약 2개월 만에 나온 고강도 주문에 모아졌다. 이날 연설에는 역사교과서 왜곡 등 다른 현안은 물론이고 대북 메시지조차 담기지 않았다. 군 위안부 해결 촉구의 메시지가 흐려지는 것을 피하려는 듯했다.
이는 평균 나이 87세에 이른 고령의 할머니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해결하는 것을 이 대통령이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반복되는 교과서 왜곡이나 우리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독도와 달리 군 위안부 문제는 촌각을 다투는 문제라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내에 거주하는 군 위안부 할머니 57명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대통령은 편지에서 “지난해 12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큰 실망을 했다. 일본 정부의 사과가 어느 외교 현안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외교관례에 어긋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문제만 (일본 총리에게) 이야기했다”고 썼다. 이 서한은 국산화장품 및 꿀세트 선물과 함께 전달됐다. 수도권 거주 할머니 28명에게는 청와대 비서관들이 직접 방문해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같은 대통령의 결의는 취임 초기와는 사뭇 달라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거듭 강조했다. “미래를 내다보지만 과거는 잊지 말자”는 정도의 표현을 썼을 뿐이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급부상을 맞아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일본이 동북아시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사고 2개월 뒤인 5월 한중일 정상회의 때 원전 피해 지역인 센다이를 방문해 그 지역 농산물을 직접 먹는 장면을 연출해 가며 일본을 돕는 우호 제스처를 보였다. 그러나 양국 실무진의 사전 의제 협의 과정에서 일본 측은 일본 총리가 다음 날 열릴 정상회담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펴겠다는 뜻을 우리 측에 전달했다. 일본 측이 실제 정상회담에서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청와대는 이런 일본의 태도에 크게 낙담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정리가 없다면 그토록 희망하는 ‘양국의 미래’도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게 바로 그 즈음”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가 ‘정부가 군 위안부 문제를 손놓고 있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도 이 대통령의 결심을 다지게 했다. ▼ MB,한일관계 ‘위안부 집중’… 정부 “이젠 日이 답할 차례” ▼
그런 만큼 청와대는 이제 공이 일본 쪽으로 넘어갔다고 보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정상회담과 기념사를 통해 문제 제기를 했으니 일본이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낼 차례”라고 말했다. 두 정상은 5월 중국에서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의 때 단독 대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일본 정부를 실질적으로 움직이게 만들 지렛대가 부족하다는 게 한국 정부의 현실적 고민이다. 정부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라 중재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하는 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일본 정부가 “1965년 청구권 협약으로 모든 법적 문제는 끝났다”고 버티면 난항을 겪을 소지가 크다.
한편 일본 정부는 이날 이 대통령의 군 위안부 언급에 대해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지난해 12월 ‘무엇이 가능할지 검토하겠다’고 밝혔듯이 정부도 계속 지혜를 짜내는 중”이라고 밝혔다. 노다 총리가 지난해 12월 교토(京都) 한일 정상회담에서 “인도적 차원에서 지혜를 내겠다”고 한 발언을 되풀이한 셈이다.
일본의 이 같은 태도는 국내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노다 내각은 동일본 대지진 복구와 소비세 인상안 등 산적한 국내 정치 현안에 발목이 잡혀 있다. 내각 지지율이 20%대까지 추락해 언제 국회 해산을 하고 총선거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은 노다 총리로서는 보수우익의 반발을 초래할 군 위안부 문제에 선뜻 나서기 어렵다.
일본 사회가 군 위안부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잃은 측면도 있다.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군 위안부 문제를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 8월 4일)나 식민지 침략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 8월 15일) 때는 일본의 양심적 진보세력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20년 정도 흐른 현재는 당시 진보세력이 현역에서 은퇴해 힘이 소진한 상태다.
이 때문에 한일 외교가에서는 군 위안부 문제로 촉발된 관계 경색이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표류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양국 외교가 군 위안부 문제를 풀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면 주요 현안의 하나인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탄력받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일 군사정보 교류 등 전반적인 방위협력도 양국 현안에서 뒤처질 가능성이 있다. 두 현안 모두 한국보다는 일본이 강하게 요구하는 사안이지만 서먹한 한일 관계는 전반적인 양국 관계의 불안정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일본 내 한류 붐과 한국 기업의 급성장에 위기감을 갖고 있는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더 키워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일본 대지진과 오랜 경제불황에 시달리며 먹고살기 힘들어진 일본이 사회적으로 보수화 경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수적 가치관을 표방하고 있는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최근 정치권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도쿄=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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