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 조작 파문을 일으킨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23일 총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무너져 가던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가 가까스로 복원의 불씨를 되살린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이 대표가 불출마하기로 한 서울 관악을 지역에 이상규 전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위원장을 공천했다. 그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주축인 ‘경기동부연합’의 핵심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날 인터넷에선 이 전 위원장의 공천에 대해 “(경기동부연합의) 얼굴 대신 몸통이 나섰다”는 평가가 퍼졌다. 민주당은 ‘이정희 대타’인 이 전 위원장을 야권연대 단일후보로 인정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선 “통합진보당이 당 대표의 여론조사 조작 파문을 개인의 실수로 돌리고 정치적 실익은 그대로 챙기겠다는 꼼수를 부리며 야권연대의 취지를 더럽히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 대표는 이날 오후 3시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많은 분이 애써 만들어온 통합과 연대의 길이 저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몸을 부숴서라도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며 후보직 사퇴를 선언했다. 그는 이어 “야권 단일후보 선정 과정에서 부족함도 갈등도 없지 않았고, 경선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저”라며 “(저의 사퇴로) 야권 단일후보에 대한 갈등이 모두 털어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회견 전부터 울었는지 눈이 부은 채로 정론관에 들어선 이 대표는 5분 정도의 회견 도중 자주 목소리가 떨렸고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을 앙다물기도 했다.
한명숙 민주당 대표는 “이 대표의 큰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며 “관악을에서 통합진보당 후보가 교체되면 그 후보를 야권 단일후보로 인정하고 그 지역에 무공천하겠다”고 말했다. 통합진보당은 이 발언이 알려지자 기다렸다는 듯 이상규 전 위원장을 후속 공천자로 발표했다. ▼ “경기동부연합, 실체 드러나자 ‘죽어야 사는 카드’ 선택” ▼
이 대표가 후보 사퇴를 발표하자 민주당은 야권연대 갈등의 또 다른 진원지인 경기 안산 단원갑을 통합진보당에 양보했다. 이 지역 경선에서 졌던 백혜련 전 검사는 이날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야권연대 대의를 위해 경선과 관련한 모든 의혹을 가슴에 담고 떠난다”며 물러섰다.
○ 계파 갈등 조율되자 사퇴 결정한 듯
23일 오전까지만 해도 ‘오후 2시 총선 후보 등록’을 수차례 공지한 이 대표가 오후에 전격적으로 사퇴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버티기로 야권연대가 무너지면 정치적으로 재기 불능의 치명상을 입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날(22일) 야권연대를 막후 조율한 시민사회 원로들이 이 대표의 후보직 사퇴를 촉구하는 등 ‘동지’들의 압박에도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다는 게 이 대표 주변의 전언이다. 전날 밤 부산에서 서울로 온 문재인 민주당 상임고문과 가진 심야 회동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에선 야권연대를 지켜내야 한다는 원칙에는 공감했다고 한다.
이 대표가 만약 출마를 강행한 상황에서 야권의 총선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는다면 야권연대 파괴 및 총선 패배의 장본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우기 어렵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좌파의 박근혜’ ‘진보의 얼굴’로 불릴 만큼 강한 대중성과 소통 능력을 갖춘 이 대표가 4년 임기의 금배지보다는 향후 정치인생을 감안해 뒤늦게나마 ‘죽어야 사는’ 카드를 택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 대표가 향후 벌어질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원내 입성을 재시도할 것이란 전망이 있다.
하지만 이 대표 사퇴 문제를 둘러싼 통합진보당 내부의 복잡한 역학관계의 실타래가 풀리면서 이 대표가 사퇴를 결정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 진보진영 원로들의 사퇴 압박에도 꿋꿋이 버텼던 세력은 통합진보당의 핵심 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으로 알려져 있다. 당 내부에서도 사퇴론이 나왔지만 이들이 ‘대안 부재’ 등을 내세워 맞섰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 대표의 후속 타자로 이상규 전 위원장이 부상하면서 각 세력 간 이해관계가 조율됐다고 한다. 당내 비주류인 이 대표 사퇴론자들은 그들의 요구대로 이 대표를 주저앉혔고, 경기동부연합은 얼굴만 바꿔 ‘관악을 공천권’이라는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는 논리다.
○ 야권연대 전면 복원될지는 미지수
아무튼 이 대표의 후보직 사퇴로 꼬였던 민주당과 통합진보당 간의 야권연대 매듭은 잇따라 풀리고 있다. 민주당은 경기 안산 단원갑을 진보당에 양보했고, 통합진보당은 야권연대 미합의 지역이었던 서울 성동을과 동대문갑에 자체 후보를 공천하겠다던 ‘엄포’를 거둬들였다. 한 대표는 관악을과 함께 여론조사 조작 논란이 불거졌던 서울 노원병(이동섭), 은평을(고연호), 경기 고양 덕양갑(박준)의 민주당 후보에게 전화를 걸어 경선 결과에 승복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야권연대가 완벽히 복원돼 새누리당에 맞설 정치적 시너지를 낼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번 여론조사 조작 파문으로 양당 간에 파인 감정의 골은 매우 깊다. 당 지도부가 손을 맞잡는다고 하더라도, 억울하게 후보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는 민주당의 탈락 후보들까지 조직을 동원해 통합진보당 후보를 전폭적으로 도와줄지는 알 수 없다. 한 대표와 이 대표는 25일 오전 국회에서 회동한 뒤 향후 야권연대 복원 방향 등에 대해 공동 기자회견을 갖기로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