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가 보는 총선]<5>시인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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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4일 03시 00분


말이 안 되는 요란한 언어들의 계절

다시 정치의 계절. 요란한 언어들이 지겨워, 신문을 보아도 정치면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사회와 문화를 슬렁슬렁 훑어보고, 바로 날씨와 스포츠면을 펼친다. 요즘 내게 즐거움을 주는 건 축구와 여행뿐. 그리고 드라마 ‘빛과 그림자’를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1970년대 한국 연예계와 정치권력의 이면을 다룬 드라마를 보며, 새삼 권력의 본질을 생각한다. 권력으로 돈을 만들고, 다시 돈에서 권력이 나온다. 돈이 없으면 정치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돈이 없으면 초등학교 학급반장도 못한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어머니는 어린 내게 당부했었다. “너, 반장 절대로 하지 마. 선생님이 시켜도 못한다고 해.” “왜”라고 내가 물었던가. 전교 일등을 한 딸 때문에, 담임선생에게 줄 돈이 없어서 걱정하는 엄마의 어두운 얼굴을 본 뒤부터, 나는 반장 따위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당시 내가 다니던 서울의 공립학교에서는 전교 일등을 배출한 반의 담임이 다른 선생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 회식비는 당연히 해당 학생의 부모가 내야 했다. 반장이 되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싫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무슨 의원이니 위원들을 마주치면 건성으로 인사하고 자리를 피했다.

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당이 불쑥 솟아나는 것도 정치에 대한 나의 환멸을 깊게 했다. 도깨비 방망이로 두드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당명을 하루아침에 바꾸나. 갖다 붙일 이름이 고갈될 때까지 헤쳐 모여를 반복하려는지. 당의 간판도 책임지지 못하는 인간들이 책임정치 운운할 자격이 있나? 선거철만 되면 주소지를 옮기는 뜨내기들에게 살림을 맡겨야 하는 국민들이 불쌍하다. 지역에 오래 살지 않고 어찌 지역 현안을 다루는 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지.

내가 사는 춘천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공약을 훑어보며 지루한 문장들, 문장이 되다 만 명사들의 나열, 조잡한 언어에 질렸다. 직업이 변호사인 A가 제시한 블루골드(Blue-Gold)프로젝트. 그렇게 외래어를 써야 전문적인 식견을 증명한다나. 소양강 물을 이용한 사업 내용을 한참 읽은 뒤에도 나는 블루와 골드를 이해하지 못했다. 역시 변호사인 또 다른 후보는 ‘명품 대학도시’를 정책으로 내놓았다. 나는 명품이라는 물건은 사지 않는데, 이번에도 찍을 사람이 없네. 경춘선 전철의 의자를 바꿔주겠다는 후보가 있다면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할 텐데. 남춘천역에서 상봉역까지 1시간을 딱딱한 의자에서 흔들리노라면 엉덩이가 아파서, 인생이 우울해진다. 미리 커다란 가방에 방석을 챙겨 넣는 것도 일이다. 간이방석을 그냥 두고 내릴까 봐 앉아서도 마음이 불안하다. 급행열차는 바닥도 푹신하고 훨씬 편안한데 자주 오지 않고 5000원쯤 비싸다. 난방비와 냉방비를 아껴서 전철 의자에 방석을 깔아주면 안 되나. 누가 후보로 나서야 그날이 오려나.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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