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3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일을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했다. 11일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한 것에 이은 조치다. 후계자 김정은은 당에서는 ‘제1비서’를 맡은 데 이어 국방위원회에서는 ‘제1위원장’으로 격을 낮췄다. 아직은 ‘아버지의 후광’이 절실한 만큼 자신을 낮추면서 실리는 취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 아버지 우대하며 실리 챙긴 김정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뒤 김정일은 1998년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했다. 전문가들은 김정은도 이런 선례를 따라 총비서나 국방위원장 중 한 자리를 아버지에게 헌정할 것으로 예상해 왔다. 김정은은 두 자리를 모두 아버지에게 바쳤다. 김정일은 ‘영원한 총비서이자 국방위원장’이 됨으로써 ‘영원한 주석’ 김일성을 뛰어넘는 지위를 갖게 됐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동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원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높이 모실 데 대하여 헌법에 수정 보충했다”며 헌법 개정이 이뤄졌음을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라고 규정했던 기존 헌법 서문에 김정일의 위상을 반영해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통신이 김정일을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한다는 기사에서 ‘태양조선’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김정일에 대한 예우와 관련이 있다. ‘태양조선’은 올해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시신이 안장돼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을 ‘금수산태양궁전’이라고 바꿔 부르면서 등장한 것이다. 2월 20일자 노동신문은 김정일에게 대원수 칭호가 부여되고 금수산태양궁전으로 이름이 바뀐 것에 대해 “강대한 태양조선이 다시금 천하를 뒤흔든 일대 사변”이라고 밝혔다.
김정은이 이처럼 김정일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은 아버지 김정일에게 절대적 충성을 보임으로써 세습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후계자의 제1덕목으로 규정돼 있다.
김정은은 이날 최고인민회의가 끝나자마자 평양 만수대 언덕에서 열린 김정일의 대형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수십만 명의 군중이 이를 지켜봤고 조선중앙TV는 이 모습을 생중계했다. 아버지를 지극하게 모시는 모습을 주민들에게 보여주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실리를 챙기고 있다. 이날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수위에 높이 추대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의안이 결정됐다. 이는 국방위 제1위원장이 국가 최고영도자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기존 헌법에는 국방위원장이 국가 최고영도자로 돼 있다.
김영수 서강대 부총장은 “북한으로서는 절묘하고 세련된 수를 선택한 것 같다”며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비판은 피하면서 실권을 고스란히 다 챙겼다”고 평가했다. 대니얼 핑크스톤 국제위기그룹(ICG) 서울사무소장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원래 갖고 있던 직함은 그들에게 부여하고 그 자리는 고스란히 물려받음으로써 정통성을 갖게 됐다”며 “따라서 구세대 인사들이 새 정권에 도전하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반면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최진욱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정은과 후견세력이 집단지도체제로 북한을 통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김정은을 절대 권력자로 만들어주지는 않겠다는 후견세력의 뜻이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 김정일 ‘선군 유훈’ 받들어
김정은이 이번 당 대표자회와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강경 군부파와 온건 대화파 중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외부의 큰 관심사였다. 아직 국방위와 내각의 인선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는 일단 강경파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단적인 예로 이번 당 대표자회에서 당의 핵심기구인 정치국 위원에 새로 임명된 6명 가운데 김정각 인민무력부장, 현철해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이명수 인민보안부장 등 4명이 군부 출신이다. 이들은 김정은 집권 이후 승진했거나 기관의 장을 맡아 중용되고 있다.
반면 온건파를 배려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온건파의 수장 격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위원으로 승격시키기는 했지만 상무위원에 오를 수도 있다는 예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조선중앙TV는 13일 김정일 동상 제막식을 방송하면서 장성택을 ‘국방위 부위원장’이라고만 소개해 그의 자리에 변동이 없었음을 내비쳤다.
외교라인을 이끌면서 미국과의 대화를 주도했던 강석주 부총리 겸 정치국 위원,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이용호 외무성 부상도 이번에 당에서 새로운 직책을 받지 못했다. 김정일의 유훈을 따라 ‘선군(先軍)체제’로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김정은이 일단 군부를 우대하겠다는 뜻을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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