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보보호협정(GSOMIA) 서명식은 오늘 하지 않는 것으로 됐습니다. 한국 및 일본 외교당국에서 오늘 적절한 시점에 설명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29일 협정 체결 취재를 위해 길을 나서던 일본 도쿄의 특파원들에게 주일 한국대사관으로부터 “e메일을 확인해 달라”는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긴급 공지’라는 제목의 e메일이 전달된 시간은 오후 3시 20분. 4시로 예정된 서명식이 40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거센 반발에 시달려온 한일 간 첫 군사협정인 정보보호협정 서명식은 이렇게 무기한 연기됐다. 정부는 이날 “국회와 협의한 뒤 다시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급속히 추진력을 잃어버리면서 향후 이 협정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 막판에 갑자기 뒤집힌 방침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한일 간 협정 서명식은 예정대로 진행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각의에서 협정 체결안이 처리됐다는 소식을 접한 주일 대사관은 서명식 준비를 모두 마친 뒤 본부의 최종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과 도쿄에서는 ‘체결 이후’로 보도 시점을 정한 보도자료와 전문 내용도 미리 배포됐다.
그러나 비슷한 시간, 협정의 강행 처리에 대한 여론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여당 내에서 급속한 기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전 9시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원내대책회의에서 협정 체결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쏟아진 것이다.
원내부대표인 김을동 의원은 “비공개 처리는 정부가 국민 여론을 무시한 것”이라면서 “지도부는 정부가 당과 국회를 무시한 처사를 쉽게 보지 말고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비공개 회의에서 의원들은 적어도 ‘밀실 처리’ 논란 속에 협정이 체결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고 한다. 이어 오전 10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런 우려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오후 2시. 이한구 원내대표는 진영 정책위의장과 만나 “국민 정서와 절차를 고려할 때 협정 체결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이 원내대표는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전화해 협정 유예 및 보류를 촉구했다. “국민 정서에 반하는 문제도 있고, 절차상 급하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채 체결하는 것은 너무나 부적절하다”며 국회 협의 절차를 거칠 것을 요구했다.
새누리당은 전날까지 김영우 대변인의 서면 논평을 통해 협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정부를 두둔하는 모양새였다. 하루 만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 망가져버린 협정, 앞으로 어떻게?
김 장관은 급히 청와대 고위 당국자들과 잇달아 통화를 하고 의견 조율에 들어갔다. 이런 움직임이 전해지면서 외교부는 크게 술렁거렸다. 일부 당국자는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국가와의 약속을 깰 수는 없지 않느냐. 당연히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라면서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여당까지 가세한 상황에서 정부는 버텨내지 못했다. 정부는 강행 방침을 전격 번복한 뒤 일본 측에 “서명식을 일단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측은 갑작스러운 연기 요청에 몹시 당황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외상은 오후 8시 뒤늦게 상황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김 장관의 전화를 받고 “양측이 긴밀히 협력해 가급적 조기에 협정에 서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여야 정치권은 국회가 7월 2일 개원하는 만큼 상임위 구성을 마치는 대로 협정의 필요성과 체결 절차의 적절성을 정부에 따져 묻겠다는 방침이다. 7월 9일 본회의를 열어 상임위원장과 위원 배분안을 의결한 직후 외교통상통일위와 국방위에서 현안질의를 할 계획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본회의가 열리면 대정부 질문을 통해서도 이 사안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며 “협정 체결은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만큼 절차적인 문제가 제기됐다면 이를 풀고 가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야당은 절차적 문제뿐만 아니라 협정 체결 자체를 반대하며 거센 정치공세를 예고하고 있어 국회 협의는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이날 협정의 완전 철회를 주장하며 “협정 체결은 이완용 같은 매국행위” “이명박 정부는 뼛속까지 친일” 같은 자극적 표현까지 동원해 대정부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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