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비극의 축소판’ 박인숙 씨의 굴곡진 삶]<上>“목숨 걸고 얻은 ‘합성’ 가족사진 한장 목숨과도 같았지만 가져갈 순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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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얻은 합성가족사진 서울에 남기고…
아버지 찾아 南으로 … 아들 구하려 北으로…

《 지난달 28일 북한에 돌아가 남쪽을 비난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한 박인숙 씨(67)의 삶은 말 그대로 남북 분단으로 빚어진 우리 민족 비극의 축소판이다. 그가 한국에 남겨두고 간 수기엔 6·25전쟁 당시 피란 도중 뜻하지 않게 이산가족이 된 순간부터 반동으로 몰려 핍박을 받아야 했던 월남자 가족의 설움, 북한 식량난에 따른 대량 탈북과 중국에서 체포된 뒤 강제 북송돼 고문 받은 내용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 남북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의 정서적 차이와 재산권 문제로 인한 갈등도 고스란히 들어 있다. 동아일보는 박 씨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 꼼꼼히 기록한 수기와 수첩 내용이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를 포함해 우리 국민 전체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판단해 수기 내용을 상·하로 나눠 소개하기로 했다. 다만 그의 한국생활과 친척 이야기는 관련 당사자의 신변안전과 명예를 고려해 쓰지 않기로 했다. 》
재입북한 박인숙 씨가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 도중 두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조선중앙방송 캡처
재입북한 박인숙 씨가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 도중 두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조선중앙방송 캡처
“내 유년기 기억의 첫 장을 꽉 채워 줬던 이 이야기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1950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박인숙 씨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네 아이들과 줄넘기를 하던 그는 어른들이 무리 지어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다.

“군대들이 줄지어 앉은 멋진 자동차가 서서히 들어오고 큰 길 량(양) 옆에는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있고,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엉거주춤 서서 흔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불안한 몸가짐을 하고 한 줄로 서 있었다. 그것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든 전쟁의 시작이었음을 내 어찌 알았으랴!”

그가 처음 본 국군의 인상은 공포였다. 박 씨의 할머니는 누군가의 집을 묻는 국군에게 부지깽이로 방향을 가리켰다는 이유로 총살될 뻔했다.

“국방군 2명이 할머니를 밭에 세워놓고 권총을 겨누고 노발대발하지 않는가!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쳐 왔다. 나는 달려가 할머니를 붙잡고 ‘우리 할머니 죽이지 마세요’라고 애원했다. 동네 어른들이 나와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사경에서 구원됐다.” 박 씨는 당시 할머니에게 달려가다 넘어져 생긴 상처를 볼 때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떠올리곤 했다.

평생 잊지 못할 국군도 있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긴 박 씨를 ‘하나도 따갑지 않게 해 주겠다’고 능청스럽게 속이고 물집을 터뜨린 뒤 성냥불로 지져 치료했다. 기절초풍하며 울었지만 효험이 있었는지 그날부터 박 씨는 뛰어다닐 수 있었다. 그는 과자와 사탕을 주기도 했다.

“나는 오빠가 마냥 좋았다. (그는)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하늘을 쳐다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도 나를 불러 노래도 배워(가르쳐) 주었다. 그 노래는 아버지와 이(북)쪽과 저(남)쪽으로 갈리어 그리울 때마다 혼자 애달피 부르곤 하던 노래였다.”

서로 다른 얼굴의 군인이 공존하는 전쟁은 어른들에겐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세상이 바뀌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었다.

“네 분이 모여서 무슨 논쟁을 그렇게 하시는지 위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끝날 줄 몰랐다…. ‘엄마 이겨라, 아빠 이겨라. 엄마 이기면 내 가운뎃손가락에 딱 붙어라’ 추워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동생은 이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옆집 동원이 아버지가 달려와 ‘아이구, 박 의사님, 어째 이러구들 있습네? 온 동리가 다 떠나가는데 빨리 가시기우!’”

합성사진으로 만난 아버지와 어머니 박인숙 씨가 서울에 남겨둔 사진. 박 씨는 1980년대 북한에서 어머니(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에 남쪽에서 구한 아버지의 사진을 합성해 보관해왔다. 아버지와 떨어져 지낸 시절의 아픔과 그리움을 합성사진으로나마 달래려 한 듯하다.
합성사진으로 만난 아버지와 어머니 박인숙 씨가 서울에 남겨둔 사진. 박 씨는 1980년대 북한에서 어머니(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에 남쪽에서 구한 아버지의 사진을 합성해 보관해왔다. 아버지와 떨어져 지낸 시절의 아픔과 그리움을 합성사진으로나마 달래려 한 듯하다.
논의 끝에 박 씨 가족도 피란길에 올랐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기다리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피란민 행렬에 묻혀 떠밀려 갔다. “식구들을 잃을까 봐 두리번거리면서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할머님에게 칭찬받기를 좋아했던 나는 발구에 타지 않고 그냥 걷겠다고 떼를 써 얼마쯤 가다가 지쳐 아버님의 등에 업혀 갔다. 그때 일곱 살이었던 내가 악돌이였다고 후에 할머님이 회고하시는 것을 들었다.”

짧았던 피란길은 어느 강 앞에서 끝났다.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어 가까이 가 보니 작은 배에 수십 명이 타고 강을 건너려는 것이었다. 맨 마지막이 우리 차례였는데 워낙 식구가 많아 절반밖에 탈 수 없었다. 나눠 타고 가면 되지 않겠냐는 말에도 아버님이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헤어질 수야 없지 않나. 모두 그 배를 타고 갔더라면 아버님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을….”

배는 돌아오지 않았고 강을 건너지 못한 박 씨 가족은 다시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때 마주친 피란민 행렬 속에서 누군가 달려 나와 “아이구, 이게 박 의사 아닙니까?” 하고 알은체했다. 그 말을 마침 주위에 있던 국군 헌병이 들었다.

“‘박 의사란 게 누군가’ 하면서 헌병이 총탁(총의 개머리)으로 아버지를 밀쳤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우성치며 쫓아가려 하였으나 사람들을 헤치고 나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울고 있었다. 남쪽으로 다시 가면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것이 (아버지와) 영영 이별이었다.”

아버지를 찾으려고 고향으로 가는 길 대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박 씨 가족을 산에서 내려온 누런 군복의 군인(인민군)들이 막아섰다.

“‘여러분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인민군과 중국지원군이 재진격했습니다.’ 밤새 세상이 또다시 바뀌었다. 아버지를 어데 두고 시체들을 넘고 넘어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박 씨는 탈북한 뒤 2006년 8월 서울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찾았지만 이미 정신을 잃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가 찾아뵌 지 20여 일 만에 그의 아버지는 딸이 온 사실도 모른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등졌다.

[채널A 영상] “평소처럼 출근했던 父, 아직도…”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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