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참이면 할머니는 각담(돌무더기)에 올라 앉아 노래를 부르다가 슬피 우셨다. 그 모습이 그리도 처량할 수 없었다. 장마당에서 사온 쌀로 이밥(쌀밥)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밥이 네 식기(그릇)가 있고 거기에 보자기를 덮어 놓았다. 내가 물으면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네 애비, 삼촌들이 올 것 같아서…. 집 나간 사람들은 꼭 온단다.’”
“깊은 밤에 자다가 깨어보면 할아버지가 자그마한 밥상에 무엇인가 올려놓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도 그것이 아들들의 명복을 비는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박 씨는 자신의 나쁜 성분에도 불구하고 정을 나눴던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 추억의 첫머리엔 사람 찾기 계주를 했던 인민학교 시절의 일화가 적혀 있다. “뛰어나가 쪽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달리시오.’ 젠장, 하필이면(남쪽으로 가신 아버지와 함께 달리라는 쪽지가 나오나)…. 눈물이 왈칵했다. 나에게 어디 아버지가 있는가! 쪽지를 던지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질하며 울었다. 주석단에 계시던 교장선생님이 달려와 나의 손목을 이끌고 달렸다. 비록 1등은 못했지만 교장선생님이 고마웠다.”
“아버지의 조수였던 황학룡 선생이 어머님을 육아원에 입직(취직)시켰다. 반동의 처인데…. 아버님과 제자의 의리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좋은 아버지인데 우리는 갈라져 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박 씨를 챙겨주던 친구도 있었다. “기술 학교에 다닐 때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고 다녔다. 점심때 나는 슬며시 나무숲에 가서 책을 보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사연을 알게 된) 내 옆에 앉은 강은산이 늘 도시락을 2개 싸왔다. (나중에) 남편을 잃은 은산이가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삶 자체가 쌀을 구하기 위한 투쟁이었던 그때 나를 찾아오기 미안했을 것이다. 살기 힘들다고 의리까지 저버린 내가 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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