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일본이 9∼10일 중국 베이징에서 적십자회담을 연다. 북-일 적십자회담은 2002년 8월 평양에서 열린 이후 10년 만이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7일 “조선적십자회와 일본적십자사 사이의 회담이 9일과 10일 베이징에서 진행된다”고 밝혔다. 북한이 일본과 교섭을 가지면서 이를 스스로 밝힌 것은 이례적이다. 북한은 그동안 송일호 북-일 교섭담당 대사가 여러 차례 일본 측과 만나 납북자 문제를 논의했지만 사전에 접촉 계획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도 3일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e메일을 보내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2일까지 싱가포르에서 미국과 비공식 접촉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이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남북 접촉은 외면하면서 주변국과의 접촉을 가속화하는 셈이다. 특히 접촉 사실을 공개해 국제여론의 주목을 끌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일본적십자사도 이날 홈페이지를 통해 “전쟁 중 또는 종전 직후 혼란 속에서 북한에서 사망한 일본인 묘의 성묘와 유골의 반환에 대해서 실무 의견교환을 갖는다”고 밝혔다. 베이징 젠궈(建國)호텔에서 열리는 이번 회담에는 양측 3명씩 모두 6명이 참석한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북한 송일호 대사는 4월 태양절 행사 참석차 방북한 일본 대표단에 “2차 대전 종전 혼란으로 한반도에 잔류했던 일본인 유골이 다수 평양에서 발견됐다”며 유골 반환 협상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힌 바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그동안 송일호 대사가 일본의 전직 관리를 의견 교환 수준에서 만났던 것에 비하면 이번 회담은 적십자사라는 양측 공식기구가 만난다는 점에서 격(格)이 높다고 할 수 있다”며 “대북 지원을 바라는 북한과 불안정한 국내정치 상황 때문에 외교적 성과가 필요한 일본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교덕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납북자 문제에 비하면 유골 문제는 가벼운 이슈”라며 “일단 쉬운 문제부터 협조관계가 구축되면 좀 더 큰 문제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도 “대화의 물꼬를 튼다면 북-일 관계 정상화 협상은 어렵더라도 인도적 지원문제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당장 북-일 관계 정상화로 이어질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다. 히라이와 �지(平巖俊司) 간세이가쿠인대 교수는 “일본은 북한이 납치문제 해결 등 변했다는 증거를 먼저 보여주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에 북-일 간에 유골 반환 협상이 잘되면 북-미 간 미군 유해 발굴 및 송환 논의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번 접촉은 순수하게 인도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정부와는 무관하다는 설명을 일본 측으로부터 들었다”며 “논의 내용과 결과물이 무엇인지는 긴밀히 지켜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런 활발한 대외 접촉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올해 2월 남측이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적십자 실무접촉을 갖자고 제의한 데 대해 전화통지문조차 수령하지 않은 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재입북한 탈북자를 동원해 ‘동까모(김일성 동상을 까부수는 모임)’을 거론하며 도발을 위협하고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김정은이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면담을 갖고 북-미 관계를 넘어 북-일 관계까지 손을 대고 있는 데 반해 남북관계의 순위는 뒤로 밀어 놓았다”며 “이명박 정권에서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