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똑같은 지적을 받고 있지만 정치권은 요지부동이다. 정치자금의 투명성 문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4일 4·11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후원금 모금 현황을 공개했다. 법에 따라 한 후보에게 300만 원이 넘는 고액을 기부한 사람들의 신상도 공개했다. 하지만 공개하나 마나다.
○ 온통 자영업자, 회사원, 빈칸뿐
총선 후보 764명에게 고액 후원금을 낸 사람은 모두 3054명(중복 기부자 포함)이었다. 이 가운데 생년월일과 주소, 직업, 연락처를 모두 기록한 사람은 2713명. 나머지 341명(11%)은 자신의 신상 중 전부 또는 일부를 감췄다.
신상을 모두 기록했다 해도 정확한 신원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844명은 직업란에 자영업자 또는 사업주라고 적었다. 650명은 회사원이었다. 사장이나 대표라고 적은 사람은 199명이었다. 이들 모두 업체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여기에 직업란을 아예 비워둔 291명까지 더하면 전체 고액 기부자의 65%인 1984명의 신원이 불명확했다.
고액 기부자가 31명인 새누리당 원유철 의원의 경우 신원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황은성 경기 안성시장뿐이었다. 황 시장도 직업란에는 지방자치단체장이라고만 적었다. 나머지 30명 중 회사원이 22명, 자영업과 주부가 각각 4명이었다. 같은 당 김태호 의원의 고액 후원자 31명의 직업 역시 자영업 25명, 회사원 3명, 주부 2명, 병원장 1명이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의원에게 고액을 후원한 4명도 모두 직업을 쓰지 않았다.
○ 허점투성이 제도
정치자금법상 고액 후원자의 신상공개는 의무사항이다. 2004년부터 그랬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신상 감추기’가 일상화돼 있다. 처벌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총선 후보는 기부자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선관위에 보고하면 그만이다.
300만 원 초과 후원자만 신상을 공개하도록 한 것도 문제다. 공천 뒷돈 제공 혐의를 받고 있는 새누리당 현영희 의원 측은 이 제도를 교묘히 이용했다. 총선에 앞서 같은 당 이정현, 현경대 후보에게 각각 500만 원을 후원하면서 A 씨 명의로 300만 원, B 씨 명의로 200만 원씩 쪼개 보냈다. 이런 ‘쪼개기 수법’은 불법 후원금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단골로 등장했다.
현 의원처럼 타인 명의나 가명으로 돈을 낸 게 들켜도 고작 200만 원 이하 벌금형이 전부다.
선관위는 지난해 4월 후원금 등 정치자금의 수입·지출 명세를 모두 인터넷에 공개하자는 내용의 법 개정 의견을 냈다. 전문가들은 인적사항이 제대로 기재돼 있지 않은 후원금은 국고로 귀속시키는 강력한 제재 수단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이제 공은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바로잡습니다]
8월 17일자 A8면 ‘고액후원자 65% 직업 등 표시안해 신원 불명확’ 기사에서 ‘민주통합당 유은혜 의원에게
300만 원 이상 건넨 기부자 11명은 모두 직업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11명 중 10명은 직업을 공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유 의원 측은 기부자의 직업이 명기된 자료를 선거관리위원회에 넘겼으나 선관위가 이를 누락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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