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교수에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 벤처기업 경영자, ‘청춘 멘토’를 거쳐 정치인으로 거듭나기까지 안철수 대선후보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안 후보는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부산 토박이 의사였다. 안 후보는 부산동성초교 시절 내성적이어서 친구가 별로 없었지만 소설을 좋아하는 독서광이었다. 그는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것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활자중독증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 적 있다.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뒤 의료봉사 활동에 참가해 서울 구로동에서 환자를 진료했다. 의대에선 “환자 진료보다 실험을 통해 병의 원인을 밝히는 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해 기초의학을 전공했다. 노벨의학상에 도전해보겠다는 꿈도 있었다. 이때만 해도 ‘나이가 들면 아버지처럼 백발에 가운 입고 환자 열심히 보는 의사가 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대 박사과정이던 1988년 컴퓨터 바이러스의 존재를 소개한 신문기사를 본 게 인생을 바꿨다. 호기심에 바이러스를 치료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첫 백신프로그램이 완성됐다. V3의 첫 번째 버전이었다.
백신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전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백신을 만들고 일과 중엔 의학대학원생, 단국대 의대 교수(1989∼1991년), 해군 군의관(1991∼1994년)으로 사는 이중생활이 계속됐다.
1994년 제대 뒤 학교와의 마찰로 교수 복직이 보류됐다. 백신프로그램 개발에 전념하자고 마음먹은 게 이때였다. 1995년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는 창업 후 얼마 안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97년까지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영을 공부했다. 매달 한 번 한국에 와서 회사운영을 살폈고 미국에선 e메일을 통해 경영을 지시했다. 이틀에 하루는 잠을 자지 못할 정도의 강행군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1997년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도 직원 월급주기가 빠듯할 정도였다고 한다.
도약의 기회를 잡은 건 1999년 4월 한국에서 수십만 대의 컴퓨터가 감염된 체르노빌 바이러스 사태 때였다. 안철수연구소는 업계 1등으로 확실히 올라섰다. 2004년 매출 300억 원을 넘어서며 소프트웨어 회사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연구소는 공익과 이윤추구가 공존하는 사례로 주목받았다. ‘최고경영자(CEO) 안철수’의 절정의 시기였다.
2005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안철수연구소 대표에서 물러났다. 한 회사의 CEO를 넘어 정보기술(IT)산업 전체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2008년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KAIST 석좌교수로 기업가정신을 가르쳤다.
2009년 6월 MBC 예능프로그램 ‘무릎팍도사’ 출연은 일대 전환점이었다. 인지도가 급상승했고 지지자들이 형성됐다. 여세를 몰아 2010, 2011년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과 함께 대학을 돌며 ‘지방대학 기 살리기’ 강연에 나섰다. 이를 본 법륜 스님이 청춘콘서트를 열자고 제안했다. 지난해 청춘콘서트는 젊은이들의 고민에 귀 기울이며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안 후보는 “무릎 굽히고 눈높이를 맞추자 그 친구들의 고통이 내 가슴속에 느껴졌다”고 말했다.
청춘콘서트 열풍이 한창이던 지난해 8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안 후보는 정치권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기성 정치에 신물을 느낀 젊은층과 무당파의 폭발적 지지는 ‘안풍(安風)’으로 불리며 정치권에 경종을 울렸다. 그가 5% 지지율의 박원순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하자 열풍은 더 거세졌다.
안 후보는 정치참여 여부를 밝히지 않으면서도 지난해 11월 재산환원 발표→올해 2월 안철수재단 설립계획 발표→4월 총선 직전 투표독려 영상 공개→7월 ‘안철수의 생각’ 발간 및 SBS ‘힐링캠프’ 출연 등으로 사실상 정치행보를 이어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