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님 아들이나 탄광 보내라’ 소리쳤다 요덕수용소 수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21일 11시 50분


北 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증언대회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대표 김태진)가 21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북한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증언대회'를 열었다.

'북한인권의 달'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증언대회에서는 끔찍한 수용소 경험담이 쏟아졌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요덕수용소에 수용됐던 김기철 씨의 죄목은 '말 반동'이었다.

"김정일의 지시로 탄광에 집단배치를 받게 됐을 때 나는 악에 받쳐 '나라가 그렇게 어려우면 장군님(김정일)의 아들들이나 탄광에 보내라'고 소리쳤다. 결국 6개월간 보위부 조사를 받고 나서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다."

김 씨는 국군포로의 자녀라는 이유로 대학에도 못 가고 수모를 받으며 살다가 겨우 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전역을 몇 개월 앞두고 제대군인들을 탄광에 집단적으로 보내라는 당국의 지시에 항의하다가 수용소에 끌려갔다.

김 씨는 수용소에서 '통영의 딸' 신숙자 씨 모녀를 만났다고 전했다. 그는 "혜원(신 씨의 장녀)이네를 서독에서 왔다고 '서독집'이라고 불렀다"며 "시간이 날 때마다 혜원이네 땔나무를 해줬다"고 말했다.

김 씨의 주장에 따르면 신 씨 모녀는 오길남 씨가 북한을 탈출한 것에 대한 '괘씸죄'로 수용소에 끌려갔다.

한편 북한 무역성 러시아 지구 외화벌이 책임자였던 장영걸 씨는 '외화를 아주 잘 번다'는 이유로 1997년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다. 장 씨는 "북한 당국은 1년에 100만 달러 이상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실적이 좋은 외화벌이 사업자들을 체포해 조사했다"며 "당시 외화를 잘 벌어 체포된 사람들이 수백 명에 달했다"고 전했다.

오빠가 회령 22호 정치범수용소 관리요원(보위부원)이었다는 허영미 씨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22호 수용소 내부에 있는 보위부 사택에서 살면서 수감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

허 씨는 "22호 수용소는 일단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못한다. 수용소 주변은 깊은 함정으로 둘러싸여 있고 경비가 철통같다"며 "22호 수용소에서 풀려나거나 도주해 나왔다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고 전했다.

이날 행사 사회를 맡은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우리 형제가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데 한국 국민이 이들을 외면한다면 역사의 죄인으로 지탄받게 될 것"이라며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들이 주축이 돼 만든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는 오는 10월 중순경 영문으로 된 '북한 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수기집'을 출간해 유엔에 제출할 계획이다.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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