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중국, 한국이 충돌 모드로 가면 단기적으로 한국에 유리할지 모르지만 구조적으로는 상당히 어려워진다. 한중이 연계한다 해도 안정적이지 않고, 일본과도 독도 문제 등으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이종원 일본 와세다대 대학원 아시아태평양연구과 교수는 최근 격화되고 있는 동아시아 영토분쟁과 관련해 "경제 안보 통일 등 한국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지역 안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한국이 대안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영토문제는 기본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하고 '제로섬' 게임인 만큼 현상을 동결시키고 유지하는 쪽으로 가야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은 자국내 우파 국가주의에 밀려 실효지배하고 있던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의 현상을 바꾸려다(국유화) 최악의 중일 갈등 사태를 맞았다"며 "한국은 이번 사태를 잘 보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에서 이방인의 시각으로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 국제정치를 연구해 온 이 교수는 균형감 있고 날카로운 분석으로 일본 내 명성이 높다. NHK 토론 프로그램에도 단골 출연하고 있다. 인터뷰는 19일 도쿄(東京) 와세다대 연구실에서 가졌다. ―현 동아시아 국제체제를 진단하면.
"2가지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의 대두와 미국과 일본의 상대적 쇠퇴에 따른 '힘의 변화'(Power Transition)다. 또 하나는 역내 교역비율 55%라는 숫자가 보여주는 '상호 의존' 심화다. 이 중 힘의 변화는 여러 가지 문제를 파생하고 있다. 그동안 일본이 경제력이라는 힘으로 눌러왔던 과거사 문제가 분출하고 있는 게 한 예다. 특히 일본과 아시아의 관계가 큰 역사적 흐름에서 볼 때 다른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나를 지도했던 일본인 노 교수는 '일본은 지난 100년 동안 아시아를 내려다보고 관계를 맺어왔다. 자신과 대등하거나 강한 아시아와 안정적인 관계를 설정한 경험이 없다. 지금부터 큰 과제다'라고 했는데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다.
동아시아 국제체제의 양면성은 한 국가 내에서도 국제협조파와 내셔널리스트(국민·국가주의자)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 흐름을 균형 있게 통합하는 게 정치의 과제인데 한중일 정치가 모두 불안정한 전환기를 맞으면서 적어도 단기적으로 작은 충돌이 큰 사태로 이어질 위험성이 커졌다. 두 흐름은 국가간에 상호적이기도 하다. 현재는 나쁜 상호작용이 우려되는 충돌의 사이클로 접어든 게 아닌가 하는 우려다. ―한일 관계 전망은.
"현재 과거와 상당히 다른 차원에 진입했고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은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강행으로 한일 관계가 최악이라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 때보다 심각하다. 당시는 과거사 문제가 초점이었지만 지금은 물리적 충돌 위험이 있는 영토문제까지 전면에 부상했다. 일본이 지금 하는 대로 독도 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이나 한일간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놓고 계속 얘기하면 한국도 대응을 안 할 수 없다. 한일 관계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일본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중국의 대두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대항적 내셔널리즘(민족·국가주의)이 강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일본이라는 나라와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점점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는 데 대한 반발의식, 경쟁의식, 경계감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과거 일본의 '보통국가론'(평화헌법 개정 통한 재무장)은 일본의 힘이 증대된데 걸 맞는 국제위상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방어기제가 걸려서인지 이전보다 신경질적이 됐다.
또 하나, 지금 일본 정치의 주류는 50대 이하 전후 세대다. 이들은 아시아와의 관계에 대한 역사인식이 약하다. 한국과의 관계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사고에 그치고 있다. 때문에 센카쿠 문제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 같은 극우파가 무책임하게 불을 지른 측면이 있지만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 자신이 확고한 내셔널리스트이기 때문에 국유화를 쉽게 결정했던 것 같다. 예전의 다른 총리였다면 좀 더 신중했을 것이다." ―일본은 동아시아 힘의 역전에 왜 이렇게 불안해하나.
"안전보장을 미국에 의존하는데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 동맹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아시아와 전후 문제 처리하면서 충분한 신뢰관계를 만들지 못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이나 중국은 전후 부흥 과정에서 일본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해 불만이 있어도 참은 것이다. 중국이 요즘 '우린 참을 만큼 참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맞는 얘기다. 일본은 아시아와 여전히 불신관계에 있다는 것을 아니까 힘의 변화가 불안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일본은 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하나.
"전후 국제관계를 지배한 힘의 역학이 큰 요인의 하나다. 냉전 구조와 맞물려 아시아는 약하고 분열됐었기 때문에 일본은 반성하고 보상하지 않아도 됐고, 그래서 안했다. 독일은 그래도 프랑스와 영국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성하고 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난 후 힘의 관계가 변화하고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가 보편적인 인권 문제로 인식되는 등 세계사적 변화가 있었다.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생각해서도 역사문제와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2년 교과서 왜곡 문제 후 나온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담화, 1995년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담화 등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에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가 없었다. 한일협정에 빠진 부분을 말로 보완한 것이다. 이에 반발하며 역사에 역주행하려는 흐름이 일본에 있지만 큰 흐름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이시하라 도지사 같은 사람이 이번 센카쿠 사태 등을 통해 일본 국익에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앞으로 계속 검증될 것이다. 역사에 역주행하는 사람들이 단기적으로는 박수를 받을 수 있지만 여러 부작용 나오면서 장기적으로 일본에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국민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선례도 있다. 2007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총리와 주변 인물들이 일본군 위안부에 강제성이 없다고 뉴욕타임스에 광고했는데 이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와 미 의회가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일 관계도 악화돼 아베 당시 총리는 결국 낙마했다. 아베 전 총리처럼 극우 역사인식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일본이 오히려 손해 본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일본은 아시아와 역사인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앞으로 물건 파는 것도 힘들어질 것이다." ―헌법개정을 통한 일본의 재무장은 미국이 장려하는 측면도 있다는 점에 한국의 고민이 있다. "일본의 보통국가 체제 정비는 다음 정권에서 자민당을 중심으로 보수 대연립이 구축되면 구체화될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 국가와 현재와 같은 불신이 있는 상태에서 일본의 재무장은 우려하고 경계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동맹 관계인 한국의 딜레마가 있다.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존재도 무시하기 어렵다.
한국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친(親) 중국이냐, 반(反) 중국이냐는 양자택일적 선택만 주어지는 상황은 한국에 이롭지 않다. 중국을 적대시하지 않는 형태로 넓은 의미의 안전보장 틀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구(舊) 소련을 봉쇄하는 냉전 시대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식 중국 대항 동맹으로는 중국의 대두에 대처하기 쉽지 않다. 그런 동맹을 현실적으로 만들기도 쉽지 않고 경제적 상호의존이 깊어가는 동아시아 각국의 이익에도 합치하지 않는다. 북핵 문제를 중심으로 한 6자회담이 더 진지하게 논의되고 성과가 있으면 미국 중국 러시아 포함한 동북아 다자(多者)안보틀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일본은 지금 6자회담 전망이 없는 대신 북한 위협과 한중과의 갈등이 두드러지면서 헌법개정 등 우파적 논의가 더 활성화되는 측면이 있다."
―일본이 헌법개정 및 재무장할 실제 가능성은. "평균적인 일본 사람들은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도입하면 징병제가 실시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만큼 국민들의 저항이 심하다는 얘기다. 이시하라 도지사나 아베 전 총리 등 우파들이 교육기본법을 개정해 애국을 가르쳐야 한다거나 젊은층을 자위대에 보내 체험 교육시켜야 한다며 떠드는 것은 역설적으로 일본의 국민의식이 중도에 있다는 반증이다. 일본이 이른바 보통국가로 돌아가면 군사비 지출 확대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징병제에 따른 인적 손실도 감수해야 하는데 일본이 현재 그걸 감수할 여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 갈등 출구는 있나.
"잘못하면 치킨게임(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양쪽이 모두 파국으로 치닫는 게임)이 될까봐 걱정이다. 일본이 국유화를 철회하기는 어렵겠지만 실행을 유예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노다 총리가 모든 채널을 동원하겠다고 했으니 애매한 상태로 봉합할 가능성은 있다.
이번에 중국이 세게 나오는 것은 이시하라 지사나 노다 총리 등의 우파적 언동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톤이 느껴진다. 이 상태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중국도 피해를 보겠지만 중국에의 경제 의존도가 커진 일본이 상당히 피곤해질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다시 확인한 점은 일본 정치의 수준 저하다. 정치인들이 동아시아 관계 등 큰 틀에서 생각하지 않고 국내정치 틀 안에 갇혀있다. 센카쿠도 국유화하면 오히려 안정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일본만의 논리다. 상대의 생각과 관계없이 자신들만의 논리로 진행했다 벽에 부딪힌 것이다. 최근 일본 정치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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