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조 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에 대한 정책은 여야 대선후보의 공약집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대선 공약 우선순위 첫 번째에, 문재인 후보는 세 번째에 각각 올려 놓았다. 양측 모두 가계부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두 후보 모두 가계부채로 고통 받는 서민들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계획이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은 조금 다르다. 박 후보는 재원을 마련해 자활 의지가 있는 과다채무자의 빚을 탕감해주는 데 무게 중심을 둔다. 반면 문 후보는 관련 법안 제정 및 개정을 통해 제도적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계획이다. 하지만 양측의 대책은 결국 개인의 빚을 정부가 나서서 줄여주겠다는 것이어서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 논란을 피해가기 어렵다.
○ 국민행복기금 대 ‘피에타 3법’
박 후보의 핵심 공약은 18조 원 규모의 ‘국민행복기금’을 조성해 금융회사와 민간 자산관리회사가 보유한 연체 채권을 사들이고 신용회복 신청자의 부채 50%를 탕감해 주자는 것이다. 국민행복기금은 신용회복기금과 부실채권정리기금 등을 모아서 1조8000억 원을 만든 뒤 다시 이를 활용해 정부 보증 채권을 발행해 조성할 예정이다.
또 박 후보는 제2금융권에서 연 20∼30%대 고금리 대출을 받는 서민들에게 1인당 1000만 원 한도에서 연 10%대 저금리 은행대출로 갈아탈 수 있게 해줄 계획이다.
문 후보의 공약은 이른바 ‘피에타 3법(이자제한법, 공정대출법, 공정채권추심법)을 제·개정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이 법안들을 통해 현행 연 39%인 대부업 이자율 상한선을 25%로 낮추고, 금융회사가 채무자의 상환능력을 감안해 무책임하게 대출하지 않도록 규제할 방침이다.
주택 가격이 일정액 이하이면서 1가구 1주택인 경우 개인회생계획에 주택담보채무의 변제내용이 포함돼 있다면 담보권자의 임의경매를 금지하는 방안도 있다. 집이 한 채뿐인 서민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신용불량자, 파산자 등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압류와 담보 제공을 금지하는 ‘힐링 통장’을 만드는 계획도 있다.
윤석헌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이런 공약들에 대해 “가계부채 문제의 핵심은 갑자기 경기가 더 악화되거나 외부충격이 가해질 경우 금융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라며 “양측 후보들이 이런 점은 놓치고 부채탕감 등 지엽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고 비판했다. ▼ “빚탕감, 도덕적해이 우려”… “이자제한, 불법사금융 키울 수도” ▼
금융 당국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두 후보의 공약은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다”며 “어느 한쪽을 편든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 “모럴 해저드 유발하고 시장 왜곡”
박 후보의 공약은 모럴해저드를 유발하고, 정부 재정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창현 금융연구원장은 “부채를 50%
탕감해주겠다고 하는데 탕감 비율이 적정한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며 “이 비율이 너무 높으면 모럴해저드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 후보 측에서는 “국민행복기금 재원은 각종 기금을 종잣돈으로 발행하는 채권이어서 정부 재정이 투입되는 건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현실을 오도한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정부의 지급보증이 따르는 채권이 부실화하면 결국 정부 재원이
투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채권은 미래 세대가 대신 빚을 지는 것”이라며 “선거캠프에서 별 부담 없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잘못된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실제로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8월 말 기준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1.32%로 이 중 저축은행은 11.58%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문 후보 공약 중 ‘힐링 통장’과 ‘1가구 1주택 임의경매 금지’도 모럴 해저드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정근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매 위험이 사라진 대출자들이 연체를 남발할 수 있다”며 “압류가 안 되는 통장이 있다면 채무자
입장에서는 수익이 생기면 빚을 갚기보다는 압류를 막기 위해 일단 (힐링)통장에 돈을 넣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피에타 3법’은 서민들을 불법 사채시장으로 내몰고 시장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자율 하락으로 수익이 나빠진 대부업체들이 불법 사채시장으로 숨으면 저신용, 저소득층들은 돈 구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 하우스푸어 대책도 해법 달라
하우스푸어 문제에 대한 두 후보의 해법은 큰 차이가 있다.
우선 박 후보는 하우스푸어에 대해 소유주가 주택 지분 일부를 공공기관에 넘기는 대신에 일정액의 수수료를 내고 계속 거주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렌트푸어에 대해선 집주인이 보증금을 은행에서 빌리는 대신에 세입자가 이자를 부담하고 정부가 각종 세금면제
혜택을 주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소유주와 세입자를 나눠 맞춤형 대책을 세운 것은 의미가 있지만 실효성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한다. 주택 소유에 집착하는 국민들이 지분을 공공기관에 넘기는 데 거부감을 갖고 있는 데다 렌트푸어를 위해 세입자
대신에 돈을 빌려줄 집주인이 드물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차라리 세입자가 전세금을 빌릴 때 정부가 이자를
보조해 주는 게 훨씬 실효성 있는 대책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문 후보는 하우스푸어 문제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하우스푸어 문제는 자신의 상환능력을 감안하지 않고 돈을 빌린 채무자와 채무자의 상환능력에 관계없이 돈을 빌려준 금융회사의 공동책임이라는 인식에서다.
그 대신 문 후보는 하우스푸어를 위한 대책은 만기를 늘려서 일시에 납부해야 하는 이자 상환액을 낮춰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변동금리, 단기 일시상환 방식의 주택담보대출 구조를 고정금리, 장기 분할상환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소득공제
한도를 확대하고, 고정금리 대출 후 금리 하락으로 채무자가 피해를 보는 것을 막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금리 인하 요구권도
확대하기로 했다.
정찬우 한국금융연구원 부원장은 “장기 분할상환, 고정금리 구조로 바꾸는 건 채무자들에게 혜택을 줘도 은행들이 따르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금융기관에 대한 인센티브가 빠진 게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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