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대-인사가 만사다]<4> 첫 책임총리- 역대 총리들의 성공과 실패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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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세총리냐 의전총리냐… 인물 따라 극과 극

1991년 남북총리회담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가 북한의 연형묵 총리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름만 총리지 당 서열이 10위도 안 된다.” 옆에서 이 얘기를 듣던 당시 국무총리실 서기관이었던 새누리당 정두언 국회의원은 이런 생각을 했단다. ‘그건 남한도 똑같지 않나?’

정 의원이 2001년 펴낸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는 조선시대로 따지면 영의정이다. 하지만 실제 위상은 사뭇 다르다. 임명직 중 최고위직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권 없이 책임만 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역대 국무총리들의 부침이 유난히 심했던 이유다.

○ 강한 총리의 영욕

정 의원은 자신의 책에서 ‘부지런하고 똑똑한 유형’의 총리로 4명을 꼽았다. 그들은 노재봉, 강영훈, 이회창, 박태준 전 총리다. 이 중 다시 총리에게 부여한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한 인물로 강, 이 전 총리를 지목했다. 이들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해당 장관을 불러 질책하기도 하고, 대통령과 독대해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전 총리는 1993년 말 우루과이라운드 쌀 개방 파동으로 김영삼 정부가 첫 위기를 맞았을 때 그 타개책으로 기용됐다. 감사원장 등을 지내며 ‘대쪽’ 이미지를 만든 이 전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법전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을 법대로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어느 총리 못지않게 뛰어난 부처 장악력을 보이며 실질적 내각 통솔에 나섰다.

문제는 청와대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등 권력 핵심기관과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이었다. 총리가 강한 권력을 행사하려 하자 청와대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대통령만 바라보는 여당에서도 이 전 총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여기에 자신의 사적 발언이 수시로 여권에 흘러들어가자 안기부의 불법감청(도청) 실태를 파악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권력 정점과의 충돌은 ‘4개월 단명(短命) 총리’로 막을 내렸다.

누구보다 강했던 또 다른 총리를 꼽자면 노무현 정부 시절 이해찬 전 총리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전 총리는 이회창 전 총리와 달리 대통령의 전폭적 신임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이해찬 총리와 나는 문제를 내놓고 답을 쓰라고 하면 거의 비슷한 답을 써낸다. (우리는) 천생연분이고 나는 참 행복한 대통령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해찬 전 총리도 “야구팀으로 말하면 대통령은 구단주고 총리는 감독”이라며 스스로를 정권 2인자의 반열에 올렸다. 실제 이 전 총리가 2005년 중동 순방에 나섰을 때는 공무원 40여 명, 경제인 40여 명, 기자 20여 명 등 수행인원만 100여 명에 달해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이 전 총리는 직설적 성격에 절제되지 않은 말로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내에서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다 철도파업 와중에 일어난 ‘3·1절 골프 파동’으로 불명예 퇴진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초대 총리였던 고건 전 총리는 농림부 장관이 경질된 뒤 자신도 모르게 후임자가 내정돼 언론에 발표되자 후임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 임명제청권을 행사해 관철시킨 적도 있다. 고 전 총리 퇴임 후에도 두 사람은 껄끄러운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 역대 총리 10인 10색

서울대 총장 출신인 정운찬 전 총리는 가장 고전한 총리 중 한 명이다. 세종시 수정안이라는 정국 최대 현안에 묶이면서 정치권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정치 경험이 없다 보니 재임 기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결국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자 정 전 총리는 재임 10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명망가형 총리’의 한계를 보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행정 경험이 없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전체 행정을 총괄하는 총리 자리를 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정 전 총리의 뒤를 이은 김황식 총리는 청와대 안팎에서 ‘기대 이상 선전한다’는 평가가 많다. ‘중도저파(中道低派)’를 자처하는 김 총리는 정치색이 없고 소외된 계층을 배려하는 자세를 보였다. 김 총리가 현 정부 임기가 끝나는 내년 2월까지 재임(2년 5개월)하면 정일권(6년 7개월), 김종필(두 차례에 걸쳐 6년 1개월), 최규하(3년 10개월) 전 총리에 이어 역대 네 번째 장수 총리가 된다.

정두언 의원은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김영삼 정부 초대 총리인 황인성 전 총리가 취임 이후 퇴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고 적었다. 총리가 대통령의 의중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통령과 각 부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는 데 더 공을 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역대 총리들이 ‘의전 총리’ ‘대독 총리’라는 비판을 받지만 저마다의 특장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 초대 총리인 한승수 전 총리는 재임 기간 전국 시군을 모두 돌아본 것으로 유명하다. 한 전 총리가 유엔총회 의장 등을 역임하며 맺은 국제적 네트워크는 우리나라의 금융위기 극복에 적잖은 힘을 보탰다는 평가도 받는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총리인 한덕수 전 총리는 당면 현안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스쿨폴리스(학교전담경찰관)제 확대나 다중이용시설 안전문제 등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 노재봉 전 총리는 앞을 내다보는 눈이 좋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1년 타이프는 여직원만이 치던 시절, 책상마다 PC를 지급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직원들에게 매우 깐깐했던 총리로도 알려져 있다.

총리실 직원 가운데 인품만 놓고 보면 김영삼 정부 시절 이홍구 전 총리가 으뜸이라고 하는 이가 많다. 부하 직원에게 미안한 마음에 일을 제대로 시키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전 총리의 후임인 이수성 전 총리는 서울대 총장 출신으로 현실 정치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대한민국 최고 마당발’이라는 평가 속에 나름대로 정치력을 발휘했다. 당시 이 전 총리가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만 3000여 개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97년 당시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5위에 그쳤다.

이재명·이남희 기자 egija@donga.com
#국무총리#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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