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이 경제부총리로 영전하고 국무조정실(현 국무총리실)의 차관급 자리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는 조직개편이 이뤄졌다.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는 후임 국무조정실장은 물론이고 차관급 두 자리도 모두 국무조정실 내부 인물을 승진시키려고 했다. 청와대와 정부 부처들에서 ‘국무조정실이 좋은 자리를 독식한다’는 불만이 흘러나왔다. 전직 고위 관계자는 “이 총리가 ‘일을 안 했으면 안 했지 나와 일할 사람을 내가 선택하지 못한단 말이냐’며 밀어붙여 결국 성사시켰다”고 회고했다.
2009년 9월 정운찬 총리가 취임했지만 보통 총리와 진퇴를 같이하는 총리 정무실장은 한동안 바뀌지 않았다. 정 총리가 국가정보원 출신 김유환 씨를 정무실장에 앉히려고 하자 청와대와 여권 일각에서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2010년 2월에야 정무실장은 교체됐다. 정 총리는 사석에서 “나와 일할 사람 한 명조차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냐”며 울분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처럼 국무총리의 위상은 시기에 따라, 인물에 따라 차이가 크다. 인사와 정책을 좌우하는 ‘실세 총리’가 있는가 하면 실권도 없이 ‘의전 총리’ ‘대독 총리’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총리에게 실질적 권한을 부여하겠다”며 ‘책임총리제’를 약속함에 따라 새 정부에서 총리의 위상은 확고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세종시 시대’가 시작됨에 따라 책임총리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책임총리제가 실현되려면 대통령의 의지, 제도적 뒷받침과 함께 그 위상에 맞는 인물이 임명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특히 대통령과의 신뢰 속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되 책임총리로서의 소신을 갖춘 인물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도덕성과 경륜, 대통합의 상징성도 책임총리가 갖춰야 할 자질이다.
① 대통령과의 돈독한 신뢰관계
전문가와 전·현직 관료들은 ‘대통령과의 신뢰’를 책임총리의 첫 번째 요건으로 꼽는다. 책임총리라도 ‘대통령 보좌’라는 헌법상 위상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총리실에서 정무비서관 등을 지낸 이재원 한국외국어대 재단 이사는 “대통령과의 신뢰, 시대적 상황, 본인의 능력이 맞아떨어져야 총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 중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 “세종시 시대에 걸맞은 위상-권한 스스로 챙길 줄 알아야” ▼
한 예로 김황식 현 총리는 2010년 김태호 총리후보자의 낙마 이후 ‘대타 총리’로 임명된 측면이 있었고, 이명박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도 없다. 하지만 점차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지난해 검경 수사권 문제 등 주요 갈등 사안의 해결을 김 총리에게 맡겼다. 정부 관계자는 “올해 들어서는 주요 현안을 대통령이 총리와 실질적으로 협의해 처리했다”며 “지금까지 ‘실세 총리’로 불렸던 총리들에 비해 역할이 결코 작지 않다”고 설명했다.
② 대통령의 보완재 역할
이런 이유로 책임총리는 대통령과 대칭관계에 있는 인물보다는 대통령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인물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많다. 총리의 임면권을 대통령이 가진 현실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충돌하면 결국 총리의 사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대통령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현 국정운영 시스템상 대통령과 총리가 생각이 다를 경우 총리가 대통령을 설득할 여지는 없다고 봐도 좋다”며 “잘못했다간 역린(逆鱗)으로 비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대쪽 총리’로 신망을 받던 이회창 총리는 헌법상 총리의 권한을 그대로 행사하려 했다. 그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내용이 자신에게 보고되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고, 대통령 해외 방문 때 국방부와 일선 부대를 시찰하고 보고를 받았다. 결국 대통령과 갈등을 빚은 끝에 그는 4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조정관 전남대 교수는 “정치적 경험과 대통령 철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통령의 보완재 성격을 갖춘 총리가 필요하다”며 “태양이 두 개가 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③ 책임총리에 걸맞은 강단과 소신
하지만 책임총리에게 걸맞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세도 동시에 요구된다. 과거 일부 총리의 위상이 지나치리만큼 낮았던 것은 “청와대가 기침을 하면 감기에 걸릴 정도”(전직 총리실 간부)로 스스로 움츠러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 정부의 첫 책임총리는 이러한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총리는 책임총리의 자질로 “강단이 있어야 한다”며 “국무위원 제청권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총리실 출신인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도 “책임총리는 자기 밥그릇을 챙길 줄 알아야 한다”며 “지금까지 그런 총리는 이회창, 이해찬 총리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창영 전 총리 공보실장은 “권한도 중요하지만 언제든지 자리를 던질 각오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④ 도덕성은 기본, 경륜은 필수
총리로 임명되려면 국회의 과반 동의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 국회 인사청문 절차가 필요 없는 대통령실장이나 국회 인사청문을 거치지만 국회 동의가 필수 요건이 아닌 장관과 주요 권력 기관장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도덕성은 책임총리의 필수불가결한 자질이다. 김대중 정부의 장상 장대환, 현 정부의 김태호 총리후보자가 야당의 ‘도덕성’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했다. 총리의 권한이 강화될수록 검증의 강도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행정부 통할권’을 제대로 행사하려면 행정 경험과 경륜도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다. 성낙인 서울대 교수는 “통합력과 행정부 장악력, 경륜이 있으면서 사회적인 평판을 갖춘 인물이라야 책임총리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⑤ 대통합과 전문성의 상징적 인물
이전 대통령들도 지역 화합이나 정치적 배려를 총리 인선의 주요 잣대로 삼아왔다. 하지만 ‘100% 대한민국’을 슬로건으로 제시한 박 당선인에게 총리 인선은 대통합의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반면 총리에게 대통령의 권한을 상당 부분 위임하려면 당선인이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딜레마가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총리와 국정을 분담하려면 대통령이 자기 사람을 써야 하고, 대통합을 위해서는 상징성이 있는 인물을 총리로 임명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상징성을 갖췄으면서도 당선인의 핵심 어젠다에 전문성이 있는 인물을 찾아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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