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하루 앞둔 2009년 12월 31일. KB금융지주 회장 최종 후보였던 당시 강정원 KB국민은행장이 돌연 후보를 사퇴했다. 일주일가량 뒤인 2010년 1월 7일이면 강 행장을 회장으로 선출하기 위한 KB금융 주주총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강 행장이 회장을 맡기로 내부적으로 ‘교통정리’가 끝나 있었다. 하지만 주주총회를 불과 일주일 남겨 두고 다시금 회장의 꿈을 접었다. 2008년 7월에도 황영기 전 회장에게 밀렸던 그였다.
강 행장의 회장 선임이 유력한 상황이었지만 금융당국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2004년부터 5년째 은행장을 맡고 있던 강 행장이 다시 지주 회장을 하는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여러 차례 물러나라는 사인을 줬지만 그는 버텼다. 금융당국이 강 행장의 운전사까지 소환해 조사하는 등 주변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결국 사퇴를 결심했다. 약 6개월의 회장 공백 끝에 2010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경영학과 후배인 어윤대 국가브랜드위원장이 KB금융 회장에 올랐다.
○ 도 넘은 정치권 입김
은행, 증권사, 보험사, 저축은행 등을 자회사로 둔 금융지주 회장이 휘두르는 권력은 막강하다. 우리, 신한, 하나, KB 등 4대 금융그룹의 총자산은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총 1200조 원에 달한다. 올해 정부 예산(342조 원)의 3배가 넘는다.
이렇다 보니 정권을 잡게 되면 일부 금융지주 회장 자리를 ‘전리품’으로 여겼다. 청와대의 의중에 따라 금융지주 회장을 임명하고, 이를 거스르는 인사는 금융당국을 통해 물러나게 만들었다.
강 전 행장에 앞서 2008년 7월 취임해 KB금융 회장직에서 14개월 만에 물러난 황영기 전 회장의 퇴임 과정도 석연치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황 전 회장이 우리금융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파생상품 투자에서 1조6200억 원의 손실을 낸 게 문제가 됐다.
황 전 회장은 금융당국으로부터 ‘직무정지 3개월’이란 중징계를 받았다. KB금융과는 관계없는 사안이었지만 결국 회장직을 내놓았다. 한 금융권 인사는 “‘돈맥경화’에 대한 금융당국 책임론이 불거지자 황 전 회장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라며 “황 전 회장이 ‘공(功)에 비해 요직을 차지했다’는 이유로 청와대 실세로부터 미움을 샀다는 말도 돌았다”고 전했다. 황 전 회장은 이명박 대선 캠프에서 ‘경제 살리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황 전 회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모피아 사이에 붕어 한 마리 넣어서는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곶감 빼먹기 좋다고 빼먹으면 안 된다”며 “민간에서 유능한 사람이 금융지주 회장으로 여럿 들어가고 권력 핵심부에서도 이들을 믿고 지지해 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 낙하산, 일부 장기집권도 부작용 초래
예금보험공사가 대주주인 우리금융은 ‘낙하산 인사’가 조직을 뒤흔든다. 황영기 전 회장과 박해춘 전 우리은행장은 당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었던 ‘이헌재 사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취임했다.
2007년 4월 재정경제부 차관 출신인 박병원 현 전국은행연합회장이 우리금융 회장이 됐지만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14개월 만에 물러난 뒤 이팔성 회장이 뒤를 이었다.
우리금융 관계자는 “외풍에 따라 CEO가 자주 바뀌다보니 인사 철이 되면 지점장들도 정치권에 줄을 대고 있다”고 말했다.
신한금융과 하나금융은 정부의 입김에서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장기집권 체제가 ‘양날의 검’과 같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은 지주회사 출범 전 1997년부터 은행장을 맡아 지난해 3월까지 15년 동안 재임했고 신한금융도 라응찬 회장이 10년 이상 ‘집권’했다.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1인 경영이 굳어지다 보니 현직 행장이 전직 행장을 고소하는 ‘신한사태’ 같은 권력투쟁이 생기기도 했다.
○ 최근엔 PK가 금융지주 회장 독식
현 정부에서는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인사가 금융지주 회장이 되면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을 비롯해 어윤대 KB금융, 이팔성 우리금융, 강만수 KDB산은금융 등 4명의 금융지주 회장이 이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금융계에서는 이들을 ‘4대 천왕’이라고 불렀다. 모피아(MOFIA)로 불리는 경제관료의 ‘자리 나눠먹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최고 권력의 측근이 낙하산으로 내려왔으니 이 같은 말이 나올 만도 했다.
6개 주요 금융지주 회장이 모두 부산·경남(PK) 인맥으로 채워져 지역 편향 논란도 불거졌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과 한동우 신한금융 회장(이상 부산)을 비롯해 강만수(경남 합천), 어윤대(경남 진해), 이팔성(경남 하동), 신동규 회장(경남 거제) 등이 모두 PK 출신 인사였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선임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일부 금융지주 회장들의 경우 새 정부 출범 후에 거취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금융권은 최근 이뤄지고 있는 금융당국의 종합검사가 CEO 물갈이로 이어질까 잔뜩 긴장하고 있다. 2년마다 반복되는 정기 검사지만 이번에는 유독 ‘강도가 셀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금융당국의 조사가 ‘CEO 흔들기’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라는 것이다.
금융시장의 자금 흐름을 정상화하고 서민금융을 지원하는 취지의 정부 개입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정부의 입맛대로 금융회사를 통제하기 위한 관치는 해당 은행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역량이 있고 사심 없이 조직을 키울 수 있는 전문가가 금융지주 회장으로 갈 수 있는 프로세스가 마련돼야 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우리금융 초대 회장을 지낸 윤병철 한국FP협회 회장은 “말을 탄 사람이 ‘말에서 내리라’고 하면 내리고 말이 어디로 가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식이면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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