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불리던 임동원 한반도평화포럼 공동대표는 1999년과 2001년 두 차례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그가 13개월에 걸쳐 장관직을 맡는 동안 남북 장관급회담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수차례 방북하며 김정일 면담을 비롯해 북한과 활발히 교섭할 때의 직함은 통일부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나 국가정보원장 또는 대통령 특보였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교섭은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2007년 2차 정상회담은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이 담당했다. 남북 관계가 급물살을 탈수록 정부는 통일부 장관보다 비공개 라인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새 정부 통일부 장관의 위상은 자리 이름에 걸맞은 실질적 역할을 할 수 있느냐, 즉 정명(正名)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① 대통령과 언제든 대화할 수 있는 관계여야
정부 고위당국자는 “통일부 장관은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워야 한다. 꼭 대선 캠프 출신일 필요는 없지만 언제든 필요한 말은 할 수 있는 관계여야 정책에도 힘이 실린다”고 말했다.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부처인 통일부는 정치권 동향과 한반도 정세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1969년 3월 직원 45명의 조사연구·교육홍보기구로 조촐하게 출범한 통일부는 1990∼1998년에는 부총리 부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때는 부처가 없어질 뻔했다. 부총리급일 때도 통일부의 위상이 항상 높았던 것은 아니다. 1993년 8월 당시 한완상 통일 부총리는 청와대의 의중과 달리 남북 공동 행사를 강행했다가 김영삼 대통령의 눈 밖에 났다. 이에 주변 지인들로부터 “(당신) 자리 보전이나 신경 쓰라”는 ‘불쾌한 위로’를 받은 일도 있다.
통일부 관계자들은 “새 정부 통일부 장관의 기능은 박근혜 당선인이 공약한 국가안보실(가칭)이 어떤 급으로 운영될지에 따라 1차적으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② 외교안보 부처와의 유기적 협력 필요
통일부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외교안보 부처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장관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 핵심 부서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하는 멤버 가운데 통일부 장관만 정보가 없는 외톨이 신세더라”라고 말했다. 국정원장은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정보를 이 자리에서 공유하지 않는다. 국방부 장관과 외교통상부 장관도 각자 방첩부대와 재외공관으로부터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지만 통일부 장관만 그런 수단이 없다.
반면 통일부의 움직임은 국정원에 낱낱이 노출된다. 모든 남북 접촉은 사전 준비부터 실제 회담까지 국정원 관계자가 참가한다. 회담 장소가 북한일 때도 마찬가지다. 통일부 장관이 국정원장과 우호적 관계를 맺지 못하면 이름에 맞는 독자적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구조인 셈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통일부 장관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맡았다. 김대중 정부의 실세였던 임동원 전 장관은 NSC 회의를 통일부 장관실에서 열 정도였다. 사실상 국정원장의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NSC는 무력화됐다. 안보정책조정회의 위원장 역할이 외교부 장관에게 넘어갔다. 통일부 장관의 기능과 역할이 대폭 축소된 것이다.
③ 북한의 협상술에 휘둘리지 말아야
협상에 능한 북한의 특성을 잘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 자리에 수년, 수십 년씩 머물며 회담 역사를 꿰고 있는 북한 대남담당 인사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남쪽 협상대표를 길들이려 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갈아 치우려 했다. 14차 남북 장관급회담 직전인 2004년 4월 30일 북한은 “단장을 김령성에서 권호웅으로 교체한다”고 판문점으로 통보해 왔다. 통일부 당국자는 “내각 책임참사인 권호웅의 직급은 심의관(3급)에 불과해 장관급 카운터파트로 상대하기엔 격이 맞지 않았지만 회담을 5일 앞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2001년 11월 장관급회담에서 9·11테러 직후 비상경계조치 및 군사훈련 등을 실시한 남한 정부에 대해 ‘회담 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라고 강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외교관 출신인 홍순영 장관은 “국군이 군사훈련을 하는 건 당연하다”며 맞섰다. 북한은 “모든 결렬의 책임은 남측 대표의 불순한 태도에 있다”며 협상장을 박차고 떠났다. 당시 청와대(김대중 대통령)는 회담 결렬에 격노했고 홍 장관은 두 달 뒤 경질됐다.
④ 국제관계에서 남북관계 해법 찾는 혜안을
전직 통일부 고위당국자는 “통일 문제는 항상 남북 관계와 국제 관계라는 2가지 측면이 결합돼 있다. 국내외를 함께 살피는 입체적인 정책 감각을 가진 사람이 통일부 장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때 남북 교류·지원은 활발했다. 그러나 남북 관계만 독주를 하다 보니 국제 협력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2차 남북 정상회담 이후 통일부와 국정원이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무리수를 두자 주변국 설득이 어려워진 외교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정권이 바뀌기만을 기다렸다는 후문이다.
이종석 전 장관은 ‘북한의 핵 개발은 핵무장보다는 대미 협상용 성격이 강하다’는 주장을 펴 왔다. 이는 워싱턴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시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1차 핵실험을 단행하고서야 그는 “핵실험을 못 막은 것은 굉장히 유감이고 회한이 든다”며 사퇴했다.
⑤ 자기 홍보(PR)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전 외교안보 고위당국자는 “통일부 장관은 자기 PR하는 자리가 아니다. 국익의 관점에서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 관계는 특성상 진전이 있을 경우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다. 특히 정치인 출신 장관들이 자기 PR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2004년 7월 통일부 장관이 된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유력 대권주자였다. 그는 2005년 6월 대통령 특사로 방북해 김정일을 면담하고 돌아온 뒤 대북 직접송전 계획을 대국민 기자회견으로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을 때도 “한국 외교의 쾌거”라며 기자회견을 했다. 하지만 성명 채택 다음 날, 미국 재무부가 북한 계좌를 동결하고 금융제재에 착수해 6자회담은 2년간 침체 상태에 빠졌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일부 장관이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자신의 치적으로 남기기 위해 정책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때조차 엄격한 대북접근만 고수했다는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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