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경찰청장(치안감)을 지낸 한 전직 경찰간부 A 씨는 9일 ‘경찰청장의 자질’을 묻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런 질문부터 던졌다. 2009년 1월 서울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은 당시 시위대가 도로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폭력성을 보여 경찰 개입이 불가피했지만 점거 하루 만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한 건 ‘불법에 관용 없다’는 이명박 정부의 강경기조를 의식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A 씨는 “철거민 농성처럼 과격한 시위는 진압 시기와 방법을 판단할 때 청와대의 의중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게 현실”이라며 “집회 시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했던 노무현 정부 때 그런 시위가 있었다면 협상 노력을 더 기울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압작전 중 시위대원 5명과 경찰관 1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당시 작전 책임자였던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경찰청장 내정자에서 사퇴했다. 정권의 의중을 외면하기도 어렵고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방패막이로 내몰리는 경찰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찰청장 후보군들이 충성 경쟁을 벌이는 사례도 있다. 경찰청장을 지낸 한 인사는 서울지방경찰청장 시절 경호인력을 이끌고 대통령 당선인 자택 앞에 자주 나타나 얼굴도장을 찍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청장 후보들이 권력 실세에게 줄을 댄다거나 특정 지역 출신이 특혜를 볼 것이란 뒷말도 무성하다.
① 국민 위해 정권과 각 세울 인물
경찰 안팎의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의 차기 경찰청장이 갖춰야 할 최우선 조건으로 정치적 중립성을 꼽고 있다. 지난해 4월 퇴임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3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경찰청장이 되는 순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국민에게 충성하는 게 진정으로 임명권자를 위하는 길”이라며 “외부 권력기관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정작 국민을 위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강조했다.
중립성이 요구되는 자리지만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부침을 겪는 게 다반사였다. 2005년 여의도 농민시위 진압 과정에서 농민 2명이 숨진 책임을 지고 사퇴한 허준영 전 경찰청장은 “정당한 법집행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의 책임을 경찰청장에게 지운다면 누가 청장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며 반발했다.
정치적 중립을 위해 도입된 2년 임기제도 유명무실하다. 2004년 임기제 도입 이후 경찰 수장을 맡았던 6명의 경찰청장 중 임기를 채운 인물은 이택순 청장뿐이다. 황운하 경찰수사연수원장은 “청와대나 국회에서 특정 사건 처리나 간부 인사와 관련해 경찰청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도 괜찮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이런 관행을 혁파할 수 있는 청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② ‘정계 진출’ 사심 없는 인물
경찰청장이 정치적 외압에 취약한 이유 중 하나는 청장직을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김대중 정부 이후 10명의 경찰청장 중 절반은 퇴임 후 청와대 또는 공기업 요직을 차지하거나 정계 진출을 시도했다.
김대중 정부 첫 경찰청장이었던 김세옥 전 청장은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실 경호실장에 발탁됐다. 어청수 전 청장은 현재 대통령 경호처장이며 허준영 전 청장 역시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지낸 뒤 지난해 19대 총선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다. 조현오 전 청장은 부산지역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출마를 준비 중이다.
지방 국립대의 한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일본에서는 경찰청장이나 판검사가 퇴직 후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고위공직자의 사회적 책임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③ 범죄 근절책 강력 추진할 인물
박근혜 당선인은 차기 정부의 핵심 목표로 사회 안전을 강조하며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 등의 범죄를 근절하겠다고 밝혔다. 현장 경찰관들이 소신껏 법집행을 할 수 있도록 치안 인프라를 갖추는 작업이 새 경찰청장의 중요한 과제다.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하면서도 경찰이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타 기관과 여론을 설득해줄 수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112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가택 수색 과정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출동 경찰관이 손실을 보상해야 하는 등 제도적 미비점이 여전하다.
④ 청렴함에 엄격한 잣대 갖춘 인물
청렴성에 대한 남다른 엄격함도 중요하다. 경찰청장의 부정부패는 공권력의 신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궁극적으로 법질서의 신뢰를 잃게 만든다. 강희락 전 청장은 재임 중 7000만 원의 뒷돈을 받은 이른바 ‘함바 비리’ 사건으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택순 전 청장 역시 재임 중이던 2007년 박연차 회장에게 사건 청탁과 함께 2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최기문 전 경찰청장은 퇴임 후 한화건설 고문으로 재직하며 해당 수사팀에 김승연 회장 폭행 사건을 무마해 달라고 청탁해 형사처벌을 받는 등 경찰 수장이 조직의 명예를 더럽힌 사례가 적지 않다.
⑤ 청장 후보군 외부로 넓혀야
현재 경찰법상 치안총감인 경찰청장 후보는 바로 아래 계급인 치안정감 5명뿐이다. 내부 인사만 청장이 되는 폐쇄형 구조다. 치안정감들마저 경찰에 들어온 경로별, 지역별로 안배가 되어 있다 보니 이들 중 준비된 인물을 고르는 게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청장 후보군을 외부로 개방해 검증된 치안 전문가가 경찰 수장을 맡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동희 경찰대 법학과 교수는 “일본은 여야와 외부 전문가,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위원회에서 경찰청장을 추천하는데 우리도 좀 더 투명한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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