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시작된 미국의 대(對)북한 비핵화 대화 20년사에서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현 덴버대 조지프코블국제대 학장)만큼 극적인 비상과 추락을 경험한 이도 드물다.
그는 2005년 7월부터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를 맡아 그해 9·19공동성명과 2007년 2·13합의, 10·3합의 등 역사적인 성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북한이 2008년 마지막 ‘검증 단계’에서 합의를 파기하면서 그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그는 북한과의 대화 창구에서 내려와 이라크 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9년 4월 북한이 태평양 상공으로 장거리미사일을 쏘고 5월 2차 핵실험을 하자 미국 정가에서는 ‘도대체 힐이 그동안 한 일이 뭐냐’는 회의론이 나왔다. 힐은 워싱턴과 서울 외교가에서 ‘김정힐(김정일+힐)’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힐의 실패’와 북한의 잇단 무력 도발은 심한 부작용을 낳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같은 말을 두 번 살 수 없다’며 취임 전 선언한 ‘강경하고 직접적인 외교’ 대신 동맹국인 한국을 앞세우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으로 돌아섰다.
미 행정부 내에서 북한 담당은 ‘잘해야 본전’인 3D 업종으로 취급받는다. 어쩌다 북한을 담당하게 된 국무부 관리들은 사석에서 “내가 자리를 지키는 1, 2년 동안 북한이 큰 사고를 치지 않기만 바란다”며 몸을 사린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최근 오바마 행정부 내에 제대로 된 북한 전문가가 없다고 지적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미 당국자들에게 북한은 말이 안 통하는 협상 대상으로 악명이 높다. 2차 북핵 위기 발발 당시인 2002∼2004년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스탠퍼드대 한국학 부소장은 13일 통화에서 “북한과 대화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기본적인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에도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북한의 모든 비핵화 대화는 거짓이었던 것이다.
대화의 내용뿐 아니라 스타일도 까다롭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협상 스타일은 보통의 주고받기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요구를 관철하려고 하는 유형”이라고 묘사했다. 북한 외무성이 비망록 등으로 미국에 제시하는 요구사항 리스트는 무조건적인 관계개선과 주한미군 철수 주장 등 비현실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다만 스트라우브 부소장은 “젊은 지도자(김정은)도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북한과의 대화에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스트라우브 부소장은 향후 미국과 한국 정부가 북한과 다시 대화에 나설 때 △한미 간의 사전 협의로 한목소리를 내고 △솔직하게 입장을 설명하며 △북한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세 가지 교훈을 명심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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