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백령도 남서쪽 2.5km 지점(추정)에서 서해 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의 기습적인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승조원 104명 가운데 46명이 전사했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26일로 천안함 폭침 사건 3주기를 맞는다. 유족과 생존 장병은 여전히 아프다. 본보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대부분 “제발 가만히 놔 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가슴속의 응어리를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유족은 말했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아직도 아들이 그립다.” 한 생존 장병은 “먼저 떠난 전우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기에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이들의 깊은 슬픔을 들어봤다.
사진은 2함대사령부에 근무하는 이상엽 중위가 6일 경기 화성의 서해안(궁평항)에서 천안함 사건 3주기를 의미하는 국화 3송이를 든 채 먼저 떠난 전우들의 넋을 기리는 모습.
박희창·손효주 기자·사진 화성=신원건 기자 ramblas@donga.com ▼ “바람은 딱 하나, 제발 국가안보가 더 강해졌으면” ▼
엄마는 울지 않았다. 하얀 스크린 위로 흐르는 영화 ‘7번방의 선물’이 슬프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어두운 극장 안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눈물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그래, 그렇겠다’ 싶으면서도 눈물이 흐르진 않았어요. 아직도 내 아픔이 너무 커서….”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본 것은 ‘아바타’가 마지막이었다. 2010년 설 전날이었던 2월 13일 아들이 엄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들과 단둘이 영화를 본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웠다. 그리고 41일 뒤인 3월 26일 아들은 엄마를 떠났다. 아들의 나이 26세 때였다. “아들 일이 아닌 다른 일에는 감정이 메마른 것 같아요.”
하루도 거르지 않은 ‘비석 세수’
2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 주황색 천을 손에 든 엄마가 나란히 서 있는 비석들 사이를 오가며 비석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닦았다. 아들은 2010년 4월 29일 이곳에 묻혔다. 바로 다음 날부터 2년 7개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석을 닦았다. “우리 아들과 전우(戰友)들 세수시켜 주는 거예요.”
아들 얼굴에 먼지가 쌓이는 게 싫었다. 엄마와 아빠의 좋은 점만 골라 닮아 두 누나보다 더 예쁘게 생긴 막내였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려 아들의 비석 주변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은 더 싫었다. “물속에서 40일 동안이나 있었는데, 또 물속에 들어가는 것 같아서….”
주변에서는 ‘일상이 되면 안 된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말까지 이곳을 찾아 아들 세수를 시켜주는 게 엄마의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남편과 함께 오전 5시 반이든, 오후 10시든 생각날 때마다 아들을 찾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손목터널증후군까지 생겼다. 손목이나 손가락을 과도하게 사용해 팔에서 손으로 가는 신경이 손목의 인대에 눌려 손이 저리거나 감각이 둔해지는 병. 아침에 일어나면 왼손 가운뎃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아 오른손으로 잡고 펴야 한다. “의사 말로는 너무 열심히 비석을 닦아서 그렇대요. 한 해, 두 해는 괜찮았는데 3년째 되니까 이렇게 문제가 생겼네요.”
아들이 떠나기 전 엄마는 심한 편두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편두통이 사라졌다. ‘우리 아들이 엄마가 아픈 것까지 다 가져갔나 보구나.’ 엄마는 한동안 그런 줄로 믿었다. 요즘은 온몸이 아프다. 사고 당시 정신적 충격이 워낙 컸고, 이후로도 아들에게 집착하면서 잊고 있었던 통증이 하나둘씩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요즘은 심장 박동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부정맥까지 엄습해온다.
“걸레 하나만 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엄마를 지켜보던 한 참배객이 말을 건넸다. “걸레가 아니라 수건이에요. 따로 빨고, 삶아서 쓰기 때문에 수건보다 더 깨끗해요.”
“엄마, 늙지 마.”
지난해 11월 말 첫째 딸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면서 18개월 된 손자를 돌봐주기 위해 엄마는 서울로 올라갔다. 현충원을 매일 찾다가 주말에만 찾게 된 게 이 무렵이다. 주중에는 할머니로 살다가 주말이 되면 대전에 내려와 아들을 찾는 엄마가 된다.
“두 딸과 손자, 손녀가 있으니까 그 시간들을 견뎌내기가 조금 더 쉬웠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도 ‘다른 자식들 생각도 하라’고 하고…. 그래도 먼저 보낸 자식이 가장 사랑스럽고 중요한 것 같아요. 이젠 뭘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가 없으니까요.”
대전 집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아들의 사진이 보인다. 아들의 안장식 때 사용했던 사진이다. 가끔 엄마는 그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사람들이 흔히들 인중이 짧으면 일찍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재엽이는 그렇지도 않았거든요. 어디가 어때서 이렇게 일찍 떠나갈 운명이었는지….”
평택 2함대사령부에 머물다 집에 온 아들은 가끔 “엄마, 두부조림 해줘”라고 말하곤 했다. 요즘 엄마는 두부조림을 만들지 못한다. 아들이 다시 생각날 것 같아서다.
아들은 하루에도 한두 번씩 꼭 전화를 할 정도로 자상했다.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 친구가 ‘아들이 평생 할 전화 다 하고 간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자기 아들은 한 달이 가도 거의 전화를 안 한다면서….”
한번은 아들이 술을 마시고 전화를 했다. 엄마가 전화기에 대고 “재엽아, 사랑해”라고 해도 “알았어”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던 아들이 그날은 달랐다.
“엄마, 늙지 마.”
엄마는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보내고 나니까 그 말이 그렇게 아프더라고요.” 아들 말대로 젊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마는 화장을 할 수가 없다.
“예전에는 화장을 꼭 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아들을 보내고 나니까 화장하는 것조차도 아들한테 죄스럽더라고요. 나만 살았는데 뭘 그렇게 가꾸려고 하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
엄마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아들이 떠나던 날 오후에도 통화를 했다. 첫째 딸이 아들 입으라고 줄무늬 반팔 티셔츠를 집으로 보내와 엄마는 사진을 찍어 아들에게 보내줬다. 아들은 “3월 30일 아니면 4월 1일에 부대로 돌아가니까 그때쯤 집에 갈게”라고 말했다. 그 티셔츠는 결국 아들이 떠나고 100일이 지난 후 불 속으로 사라졌다. ‘옷을 태워주지 않으면 영혼이 헐벗고 다닌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겨울 옷, 여름 옷 한 벌씩을 그렇게 아들에게 보내고 난 뒤에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국립대전현충원에는 보훈미래관이 있다. 1층 전시실 한쪽 벽면에는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북한 잠수정의 기습적인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한 천안함 전사자 46명의 사진이 가득 채워져 있다. 위로부터 둘째 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 엄마 강금옥 씨(58)의 아들 고 임재엽 중사가 머무는 또 다른 곳이다. 그와 전우들 앞에는 두 동강 난 천안함 모형이 유리 상자에 담겨 있다.
한 가족이 그들 앞에 몇 초간 서 있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들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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