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MB 손 부들부들 떨며 분노…“당신 많이 컸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30일 03시 00분


■ 비화(秘話) 시리즈를 시작하며

《 역대 정권은 대통령 재임 기간의 일들을 정리해 자료로 편찬해 냈다. 하지만 공식 활동 자료를 집대성한 ‘정부 기록물’ 수준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처음으로 ‘백서(白書)’를 시도했다. 그냥 기록물 편찬 수준이 아니라 반성적 의미의 리뷰라는 뜻일 게다. 심혈을 기울였지만 역시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동아일보가 이명박 정부 5년의 비화(秘話) 시리즈를 시작하는 이유도 반성적 리뷰를 위한 것이다. 시리즈에 등장하는 화자(話者)는 주로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참여한 사람들이겠지만, 청자(聽者)는 향후 5년의 국정을 책임진 박근혜 정부 인사들이기를 기대한다.

기자들은 전력을 다해 그때그때의 일들을 취재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지면에 모든 것을 다 담지는 못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지면에 보도하지 못한 기록들은 내부 정보보고로 남긴다. 하지만 그 역시 국민이 알 권리가 있는 공공재산. 시리즈의 제목을 ‘비밀해제(declassification)’라고 한 것은 그런 내부 정보보고까지 최대한 공개해 이명박 정부 5년의 리뷰 자료로 내놓겠다는 뜻이다. 》
▼ <1> 김황식 총리 발굴과 정동기 낙마 파동 ▼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와 박연차 태광실업 전 회장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는 순간 정진석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까면 깔수록 의혹이 쏟아져 나온다고 야당과 언론에서 ‘양파 총리 후보’라고까지 조롱하고 있던 터였다. 무엇보다 2007년 4월 미국 뉴욕의 한인식당에서 박 전 회장에게서 수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핵심이었는데 김 후보자는 “그 시점엔 일면식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006년 2월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박 전 회장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된 것이다. 2010년 7월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정무수석 임명장을 받은 지 겨우 한 달 남짓. 한국일보 정치담당 논설위원 출신으로 16,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 수석의 기자적 후각이나 ‘여의도 감각’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김 후보자와 박 전 회장의 사진이 공개된 그날 아침까지도 강경한 자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저를 불러 ‘김무성 원내대표를 만나 밀어붙이라’고 했습니다. 김 원내대표를 만나긴 했지만 정말 미치겠더군요.” 마지막으로 임채민 국무총리실장을 만났다. 임 총리실장은 8월 8일 개각 때 김 총리 후보자와 함께 발탁된 인물.

정=“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준비가 그렇게 소홀한 겁니까?”

임=“나는 청문회 준비하는 사람들 곁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청문회 준비는 (경남지사를 지낸 김 총리 후보자가) 김해에서 데리고 온 측근 몇 사람이 다 했습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정 수석은 임 실장에게 “대통령에게 총리 교체를 건의합시다”라고 운을 뗐다. 임 실장은 “(대통령이) 아침에만 해도 ‘밀어붙이라’고 했는데…”라며 난감해했다.

임 실장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본관으로 올라갔다. 대통령은 버럭 화부터 냈다. “천성관 케이스하고 다르잖아!” 이 대통령은 1년 전 ‘스폰서 검사’ 논란 끝에 낙마한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얘기까지 꺼냈다. 김태호 후보자가 아니라 임명권자인 대통령 스스로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절박감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순간 ‘내가 여기서 물러서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색을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천성관보다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습니다. 더 밀어붙이면 각하만 다칩니다. 이걸 리더십 손상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민심에 귀를 열고 있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라고요. 화를 가라앉히며 듣고 계시던 대통령이 툭 내뱉듯이 ‘임 실장이 (김태호를) 한번 만나봐’라고 지시하더군요.”

JP(김종필) 이후 거의 40년 만에 탄생한 40대 총리로, 여당의 대권구도까지 뒤흔들 수 있는 카드로 급부상하던 김태호 드라마는 이렇게 조기 종영됐다. 하지만 버리면 얻는다고 했던가. 김태호를 버리면서 MB는 김황식 총리를 얻는다. MB는 퇴임 인터뷰와 백서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인사(人事)’라고까지 자부했다.

▼ 총리 찾던 MB, 김황식 카드 ‘더블 메리트’에 무릎 쳐 ▼

물론 김태호에서 김황식으로 직행한 건 아니다. ‘청빈 판사’로 유명한 조무제 전 대법관도 검토됐고, 한국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장명수 씨도 접촉했다. 일부 친이(親李)계는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을 밀었다.

장명수 전 한국일보 사장은 역시 한국일보 출신인 정 수석의 아이디어였다. 정 수석은 임 실장과 함께 서울 중구 정동의 음식점 ‘달개비’에서 장 전 사장을 만났다. 요즘엔 ‘안철수-박원순 회동 장소’로 유명해졌지만 과거 민주화세력의 사랑방으로 불리던 세실 레스토랑이 한정식 집으로 바뀐 곳이다.

“제가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 장 전 사장이 주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정 수석이 잘 알면서 왜 그래. 내가 지금 나이가 칠십인데 어디 가서 새로운 일을 벌이겠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국정과 시사 문제에 대해) 쓴 글이 잘된 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여하튼 외도는 하고 싶지 않아’라며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장 전 사장의 그런 언론인다운 태도에) 임 실장도 감탄하는 눈치였습니다. 다음 날 또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장 전 사장은 거듭 ‘정 수석이 나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그래’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다 다음에 고른 인물이 김황식 총리입니다. 돌고 돌다가 대어(大魚)를 고른 거죠.”(정진석)

2011년 11월 23일 연평도 전사자 1주기 추모식장. 차가운 장대비가 내리는데도 유독 한 사람 김황식 총리만이 우산을 쓰지 않았다. 경호팀장이 건네는 우산까지 마다하고 40분간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MB는 퇴임하는 김총리의 페이스북에 “인간적이고 소박한 소통 노력에 저도 그동안 팬이었습니다”라고 경의를 표했다. 동아일보DB
2011년 11월 23일 연평도 전사자 1주기 추모식장. 차가운 장대비가 내리는데도 유독 한 사람 김황식 총리만이 우산을 쓰지 않았다. 경호팀장이 건네는 우산까지 마다하고 40분간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MB는 퇴임하는 김총리의 페이스북에 “인간적이고 소박한 소통 노력에 저도 그동안 팬이었습니다”라고 경의를 표했다. 동아일보DB
김 총리는 정 수석의 표현대로 ‘대어’였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이후 최장수(2년 5개월) 총리라는 기록만 해도 우선 그렇다.

그런데 정작 김 전 총리는 퇴임 직후 기자와 통화하면서 “아직도 내가 어떻게 (총리로) 천거됐는지 잘 모르겠다. 나도 궁금하다”고 했다. 그만큼 김황식 발탁 배경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태호 낙마라는 태풍이 지나가고, 그 상처를 치유해줄 ‘힐링 카드’로 검토했던 조무제 장명수 총리 안(案)까지 허사로 돌아가자 MB는 물론이고 여권 전체가 깊은 허탈감에 빠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총리 자리를 마냥 비워둘 수는 없는 일. 새 총리감에 대해 여러 갈래로 여론을 수집하고 있던 장다사로 민정1비서관이 새로운 착안점을 찾아낸다. 바로 ‘헌정 사상 최초의 전남 출신 총리’라는 콘셉트였다.

“전남 장성 출신인 김황식 감사원장을 염두에 두고 총리 후보를 천거한 건 아니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김두우 기획관리실장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지금까지 전남 출신 총리가 한 명도 없었다더라. 그런데 사람들이 의외로 그런 사실을 잘 모르더라’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김 실장하고는 워낙 친해서 청와대에 같이 있는 동안 서로 허심탄회한 얘기를 많이 나눴습니다.”(장다사로)

김 실장은 곧바로 대통령을 면담했다. 사실 직책으로만 보면 김 실장의 대통령 독대는 좀 어색했다. 정무비서관, 정무1기획비서관, 메시지기획관을 거쳐 그 얼마 전에 신설된 기획관리실장을 맡았지만 수석급은 아니었다. 수석(차관급)과 비서관(1급) 사이의 어정쩡한 위치였다.

그런데도 김 실장은 수시로 대통령을 따로 만났다. 김 실장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MB가 대기업 기획조정실장을 연상시키는 기획관리실장 자리를 만들어 김두우 기획관을 앉힌 배경도 그런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하튼 김 실장은 대통령에게 ‘김황식 총리안의 세 가지 장점’을 역설했다.

김 실장=“전남 출신 총리는 헌정 사상 처음입니다. 민주당도 반대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청문회 때문에 곤욕을 치렀는데 김 총리는 대법관에 감사원장까지 했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대통령=“그래? (혼잣말처럼 황인성, 고건 전 총리의 이름을 입 밖에 내면서) 정말 다 전북 출신이네….”

김 실장=“마지막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호남) 민주당의 (영남) 노무현만 있나, (영남) 한나라당의 (호남) 김황식도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습니다.”

대통령=“…….”

MB는 김 실장이 말한 세 가지 장점 중 ‘전남 출신 최초’라는 점과 ‘청문회 통과 확실’이라는 점에 꽂혔다. 연락은 임 실장이 맡았다. 김 총리 후보는 고사했지만 결국엔 받아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대통령이나 김 실장, 장 비서관은 김 총리가 ‘전남 출신 최초’를 넘어 ‘명(名)총리’라는 평가까지 받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명한 얘기지만 김 총리는 재임 중 연필로 쓴 단상(斷想)을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100편의 글을 올렸고, 떠나면서 ‘연필로 쓴 페이스북, 芝山通信’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어느 글 하나 그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게 없다. 광주법원장 시절, 우파나 좌파가 아니라 소외계층을 따듯하게 보듬는 ‘중도 저(低)파’가 되고 싶다고 했던 그의 철학이 물씬 묻어난다. 글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설사 민정수석실에 ‘역대 총리 중 전남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여론이 접수됐다 하더라도 장 비서관과 김 실장이 아니었다면 과연 위기 돌파 카드로 살아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1980년대 중반 민정당 공채 출신으로 당료생활을 시작한 장 비서관은 전북 김제 출신이다. 김 실장은 TK(대구경북) 출신이지만 과거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 야당 출입을 훨씬 더 많이 했다. 지역과 정당을 넘나드는 두 사람의 그런 커리어가 좀더 폭넓고, 유연한 상상력을 갖도록 만든 것 아닐까.

김황식 총리 청문회는 예상했던 대로 별 탈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또 다른 고비가 남아 있었다. 김 총리 지명으로 공석이 된 감사원장 자리였다.

김창혁 선임기자 chang@donga.com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가 2011년 1월 1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별관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한 뒤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고 있다. 한나라당 지도부로부터 ‘자진 사퇴 요구’라는 직격탄을 맞은 지 이틀 만에 물러난 정 후보자는 정치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회견 직전 넥타이를 검은색으로 고쳐 맸다. 그는 “후보자 지명 이후 경력과 재산 문제, 사생활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악의적으로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DB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가 2011년 1월 1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별관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한 뒤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고 있다. 한나라당 지도부로부터 ‘자진 사퇴 요구’라는 직격탄을 맞은 지 이틀 만에 물러난 정 후보자는 정치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회견 직전 넥타이를 검은색으로 고쳐 맸다. 그는 “후보자 지명 이후 경력과 재산 문제, 사생활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악의적으로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DB
▼ 安 “정동기 사퇴 촉구”에 MB 손 부들부들 떨며 진노 ▼

“감사원장은 누가 좋겠어?”

2010년 10월 초 어느 날. 김황식 감사원장의 국무총리 임명 절차를 마친 이명박 대통령(MB)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정운찬 총리 사퇴 후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낙마한 뒤 어렵사리 찾은 김황식 카드 인선을 마무리한 직후였지만, 헌법기관장인 감사원장을 오래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뒤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참모 몇 명이 들어섰다. 목영준 헌법재판관 등이 후보로 거론됐고, 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

청와대 인선 실무진은 이 중 목 재판관을 우선순위에 놓고 접촉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사자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목 재판관의 증언. “제안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현직 헌법재판관이 감사원장으로 곧장 옮긴다는 게 내키지 않았어요.” 일각에선 재산(2010년 당시 헌법재판관 중 최다인 46억6491만 원)이 문제될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청와대는 결국 목영준 카드를 접었다.

그해 11월 11일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후임 감사원장 건이 해결되지 않자 MB의 피로감은 쌓여 갔다. 9월에는 임기 초부터 함께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의 ‘외교부 특혜 채용’ 의혹을 받다 낙마했다. MB는 G20 정상회의를 마친 11월 중순 다시 후임 감사원장을 놓고 고민에 들어갔다. 그러다 정동기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카드가 나왔다. 2007년 대검차장을 지낸 뒤 2009년 천성관 검찰총장 낙마 파문의 책임을 지고 민정수석에서 물러나 정부법무공단 이사장으로 가 있던 그 정동기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 고교 후배(서울 경동고)인 임 실장 정도를 제외하고 청와대 참모들은 썩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다. 당시 청와대 핵심 참모인 A 씨. “이상하게도 정무, 홍보, 민정수석 모두 정동기 감사원장 카드에 대해 흔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크게 반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대통령의 마음은 정동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의 전언. “천성관 낙마 건도 사실 100% 정동기 전 수석의 책임은 아니었어요. 천성관을 추천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책임지고 민정수석에서 물러났죠. 그만두는 게 상식이지만 대통령은 그 점을 고마워했고 마음에 부담을 가졌을 겁니다.” 결국 정 전 수석은 그해 12월 31일 개각 발표에서 감사원장 후보자로 지명된다.

정치권의 반응은 냉담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정 전 수석이 2007년 대검차장 당시 MB의 도곡동 땅 관련 의혹 등을 덮어줬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민정수석을 지낸 대통령 측근이 어떻게 헌법기관장을 맡을 수 있느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7년 대검차장을 그만두고 7개월간 변호사 수임료로 7억 원을 받았다는 게 더해져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결국 정동기 지명 열흘 만에 일이 터졌다. 2011년 1월 10일 오전,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최고위원회의 도중 “정동기 내정자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는 게 국민의 뜻을 따르고 대통령을 위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집권 여당이 청와대와 논의 없이 MB 임기 중 처음으로 대통령 인사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상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시간 MB는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대통령 경호상 휴대전화 전파를 차단해 참석자들은 이 소식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 대신 원희룡 당 사무총장으로부터 회의 결과를 ‘통보’ 받은 김연광 대통령정무1비서관이 회의장으로 뛰어가 직속상관인 정진석 수석을 찾았다. 정 수석은 밖으로 나와 원 총장에게 “당신 정치를 어디서 이 따위로 배웠어!”라고 호통을 친 뒤 다시 회의장에 돌아왔다.

“대통령님, 지금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동기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당시 청와대는 대통령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로 정 수석의 보고를 받은 MB는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최고 수위’의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당시 한 참석자. “대통령은 2009년 천성관에 이어 2010년 김태호, 유명환이 잇따라 낙마하며 극심한 인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당이 대통령 등에 칼을 꽂은 격이었죠.”

청와대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감사원장은 국회가 동의안을 통과시켜야 임명할 수 있는 만큼, 여당의 자진사퇴 요구는 정동기 카드의 폐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임 실장 등 주요 수석들이 줄사표를 낼 상황이었고, 주무인 권재진 민정수석은 실제로 사표를 내려고 했다. MB는 참모들이 국회와 접촉하며 정동기 카드를 설득해내지 못한 점을 불만스러워했다고 한다. 이상 기류를 감지한 김두우 실장은 이날 저녁 청와대 집무실로 대통령을 찾아갔다.

김 실장=“지금 참모들을 문책하시면 당에서 청와대를 치고 들어오는 게 성공하게 됩니다.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MB=“그럼 어떻게 하면 돼?”

김 실장=“임 실장에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그 의미를 알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결국 이틀 후인 1월 12일 정동기 전 수석은 기자회견을 열고 감사원장 후보에서 물러났다. MB는 그날 오후 정진석 수석 등과 회의를 하던 임 실장의 집무실을 찾았다.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제스처였다. 당시 언론은 “대통령이 임 실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그런 제스처와 별개로 대통령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MB는 이 자리에서 참모들에게 정동기 카드를 선택한 이유를 장시간 설명했다.

“그 사람이 한양대 출신이다. 완전 비주류다. 그런 사람이 검찰에서 그 자리(대검차장)에까지 올라가려고 얼마나 자기 관리를 잘했겠느냐. 나하고 가깝다고 감사원장 시키려 한 게 아니다. 정치인들이 자기들은 얼마나 깨끗하다고 시비하느냐.”

대통령의 열변을 듣고 있던 정 수석이 입을 열었다.

정 수석=“제가 정 후보자를 만나 소주 한잔하며 위로하겠습니다.”

MB=“뭐? 당신 혼자 인간적인 척하지 마! 가슴이 아파도 내가 더 아프고, 정동기를 알아도 내가 더 잘 알아!”

MB의 분노는 오래갔다. 13일 청와대는 그달 26일 잡혔던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도부의 만찬을 연기한다고 밝혔다. 자신을 배신한 여당과는 밥도 먹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던 MB는 폭설이 내리던 1월 23일 오후 당 지도부에게 청와대 안가에서의 ‘저녁 번개’를 제안했다. 안상수 대표와 김무성 원내대표, 심재철 정책위의장, 원희룡 사무총장이 나왔다. MB는 참석자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며 싸늘하게 말했다.

“안 대표, 당신 많이 컸네.”

“……”(안 대표)

날씨만큼 얼어붙은 이 자리에서 MB는 더이상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고 당에 엄중 경고했다. 안상수는 막걸리잔에 입을 대지도 못했다.

이승헌·고성호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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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김황식#안상수#정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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