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독사과로 코너 몰린 허태열 실장
당정청 워크숍 앞두고 서둘러 결정… 정무기능 강조하더니 어이없는 사고
靑내부 “정치 오래한 분이 왜 그런…” 4월 ‘민생-정책행보’ 구상도 차질
가라앉을 듯 보였던 ‘인사 참사’의 후폭풍이 되살아났다. 김행 청와대 대변인을 통한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사진)의 ‘17초짜리 대독 사과’ 탓이다. 청와대는 1일 “사과가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며 침통한 표정이다. 정부조직 개편과 인사 참사로 새 정부 출범 첫 한 달을 허비한 청와대는 이달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강점인 민생과 정책 행보로 국정 장악력을 높일 계획이었지만 이런 구상도 시작부터 엇나갔다.
가장 난처한 사람은 단연 허 비서실장이다. 그는 지난달 27일 대통령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청와대는 정무적 기능을 하는 곳이다. 모든 수석은 단순한 비서가 아닌 정무비서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핵심 참모 가운데 허 실장과 이정현 정무수석비서관을 제외하고는 정치 경험이 없어 청와대의 정무적 감각이 전체적으로 떨어진다는 지적을 의식한 주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사고는 정무 사령탑인 허 실장에게서 터졌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허 실장이 왜 이런 방식으로 사과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시점도, 형식도, 내용도 모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며 “본인이 직접 춘추관에 가서 1분만 사과했어도 됐을 일인데, 정치를 오래 하신 분이 왜 이런 판단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허 실장은 3선 의원 출신으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지난달 30일 사과문 발표를 놓고 일부 참모는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오후 열린 새 정부 첫 고위 당정청 워크숍을 앞두고 새누리당의 기류가 심상치 않자 허 실장은 사과문 발표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워크숍 자리에서도 허 실장과 곽상도 민정수석비서관은 인사 실패 지적에 대해 여러 차례 사과의 뜻을 전했다.
청와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차라리 워크숍에서 사과한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면 뒷말이 없었을 것”이라며 “어떻게든 지난주에 인사 문제를 깔끔히 털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무리수를 둔 것 같다. 그만큼 허 실장을 비롯해 핵심 참모들이 엄청난 인사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사과 역풍’에다 엠바고(보도유예) 사안을 버젓이 청와대 블로그에 게시하는 사고 등이 잇달아 터지면서 ‘멘붕(멘털붕괴)’에 빠진 청와대는 일단 부처별 새 정부 정책 발표에 속도를 내 국면을 전환하겠다는 계획이다. 또 인사검증 라인의 인원을 늘리고 독자적인 인재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는 등 인사시스템 보완책도 마련하고 있다.
야당은 4·24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호재를 잡았다는 분위기다. 민주통합당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비대위원회의에서 “당장 눈앞의 실책을 피하려고 얄팍한 꼼수를 부리면 돌이킬 수 없는 실패와 대참사로 이어질 것”이라며 “더이상 핑계대지 말고 청와대 인사시스템과 인사라인을 확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기춘 원내대표는 “백설공주는 나쁜 왕비로부터 독사과를 받았지만 우리 국민은 청와대로부터 ‘대독 사과’를 받았다”며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문책할 사람은 문책하라”고 요구했다. 문병호 비대위원은 “허 실장은 ‘뒤끝 있는 사과’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해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정우택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에 정무장관이나 특임장관을 임명하고 대통령정무수석이 소통 문제에 앞장서야 (국정이) 원활히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허 실장과 이 정무수석 라인만으로는 당청 소통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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