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흡 낙마뒤 헌재소장 공백 방치… 지명 미룬 朴대통령이 헌법 어긴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1일 03시 00분


■ 10일 퇴임 허영 헌법재판연구원장

10일 퇴임한 ‘한국 헌법학계의 거목’ 허영 헌법재판연구원장(77·사진)이 헌법재판소장 공석 사태와 관련해 “대통령이 헌법과 헌법재판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며 쓴소리를 쏟아 냈다.

헌법재판에 관한 중장기 연구를 수행하는 헌법재판소 산하 헌법재판연구원의 초대 원장을 맡았던 허 전 원장은 8일 동아일보와의 퇴임 인터뷰에서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가 낙마한 뒤 곧바로 후임 헌재소장 후보자를 지명하지 않은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을 어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2월 14일 이 후보자 낙마 이후 35일이 지난 3월 21일에야 박한철 헌재소장 후보자를 지명했다. 전임 이강국 소장 퇴임을 기준으로 하면 60일간 헌재소장 자리가 공석 상태였다. 그는 “대통령이 헌재소장을 공석으로 방치해 헌재 기능을 마비시킨 것은 국가의 근간인 헌법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라며 “박 대통령이 헌법을 어겼는데도 이에 대해 별다른 비판이 제기되지 않은 것은 국민이 헌법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허 전 원장은 또 “헌법은 국민이 국가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며 헌법재판은 국민이 기본권을 찾아 나가기 위한 과정”이라며 “헌재 공백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헌재소장을 호선(互選)으로 뽑거나 헌법재판관 선출 요건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재판관 선출 과정에 미치는 대통령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며 “대통령이 3명, 국회가 6명의 재판관을 추천하되, 과반수 출석에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으로 임명 동의를 받게 해 여야가 공정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법관뿐 아니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이나 학자도 헌법재판관에 임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허 전 원장은 ‘한정위헌’ 문제를 놓고 헌재와 갈등을 빚고 있는 대법원도 강하게 비판했다. 한정위헌은 ‘법률을 특정 방식으로 해석할 경우 위헌’이라는 헌재의 결정 방식이다. 대법원은 “법원의 법률해석권을 침해한다”며 이 결정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대법원이 지나치게 최고사법기관의 지위를 의식하고 있다”며 “재판이 4심이 되고 법적 안정성이 흔들리더라도 국민에게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구제받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허 전 원장은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헌법 가치를 구현한 학자로도 존경받고 있다. 그는 1972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고 김수환 추기경 등이 발간한 월간지 ‘창조’에 박정희 정부의 8·3 긴급금융조치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남산 중앙정보부 분실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후 경희대의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연세대 법대 교수 시절인 1995년에도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대해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결정을 내리자 이를 헌법이론에 비춰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허 전 원장은 10일 퇴임식에서 “평생 처음 맡는 공직에 대한 중압감에 원장직을 수락한 것을 뒤늦게 후회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2년 임기를 회고했다. 이 기간 헌법재판연구원이 헌재의 37개 주요 결정을 토대로 발간한 ‘헌법재판 주요 선례 연구’는 법학자들에게 ‘눈여겨볼 만한 헌법 연구서’로 주목받는다. 헌법재판연구원은 또 일반 국민이 좀 더 쉽게 헌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난해 12월 ‘알기 쉬운 헌법’이라는 교재를 발간하기도 했다. 허 전 원장은 이 책의 발간사에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누구보다 헌법의 정신과 가치를 잘 알고 있어야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학문적 신념을 담아 넣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허영#헌법재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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