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MB) 정부 인선 작업에서 손을 떼게 된 정두언 당선인보좌역은 ‘멘붕(멘털 붕괴)’에 빠진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자문했다. 인사위원회를 접수한 류우익과 이를 실무적으로 주도하는 박영준을 막지 못하면 썰물 빠지듯 권력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정두언은 류우익으로부터 인사위 ‘실무위원’ 제안을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대신 정두언은 초대 대통령실장 자리에 주목했다. 임기 초에는 어느 때보다 권력이 청와대로 쏠린다. 마침 초대 실장에 윤진식이 유력하다는 말이 돌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고 인수위 산하 국가경쟁력강화특별위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 윤진식이었다. 정두언은 자신과 큰 인연은 없었지만 류우익과 박영준을 견제하기엔 제격이라고 봤다. 명분도 그럴듯했다.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MB 밑에 경제관료 출신 대통령실장 조합이었다. 이때까지도 정두언이 인사 작업 전반을 류우익, 박영준에게 넘긴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정두언까지 가세한 ‘윤진식 유력설’은 여의도를 중심으로 더욱 확산됐다. 일부 언론은 2008년 1월 16일자에 이 소식을 취재해 윤진식 유력설을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간, ‘류우익 인사위’에선 전혀 다른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1월 중하순 어느 날. 인사위 멤버들이 서울 종로구 ‘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 내 사무실에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수위 멤버들이 베이스캠프로 활용하던 곳이다. 이 자리에선 ‘초대 대통령실장은 류우익’이라는 MB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참석했던 A 씨의 증언. “류우익이 인사위를 꾸린 후로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초대 대통령실장이 청와대 인선과 조각을 주도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나?”
이 소식은 오래지 않아 정두언 귀에도 들어갔다. 깊은 허탈감이 몰려왔다. 정두언은 1월 25일 오후 오랜만에 삼청동 인수위 기자실을 찾았다. 여전히 ‘최고 인사 실세’로 통했던 정두언을 수십 명의 기자가 삽시간에 에워쌌다. 그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정두언=“그런데 인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기자들=“에이, 인사를 하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정두언=“기자들이 나에게 전화를 많이 하는데, 사실 나는 (인사와 관련해) 아는 게 없다는 것을 고백하러 왔어.”
대부분의 기자는 정두언이 특유의 너스레를 떠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당시 정두언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MB는 2월 1일 류우익을 초대 대통령실장으로 공식 임명한다. 류우익은 임명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은연중에 대통령실장 내정자로 일해 왔음을 내비쳤다. “그냥 늘 대통령에게 조언해드리고 상의했다. 청와대가 어떤 곳이고 대통령 직무가 어떤 것인지 등은 따로 설명 안 해도 알 만큼 알게 됐다.”(동아일보 2008년 2월 2일자 A2면)
‘류우익 대통령실장’이 막상 현실화되자 정두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류우익, 박영준, 더 나아가 이상득(SD) 전 국회부의장 판이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주변에선 “어떻게 만든 정권인데 이대로 물 먹고 있을 거냐”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정두언은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대선 직후 검증을 시작해 나름 오래 준비한 카드가 있었다. 정두언과 주변 그룹이 만든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안의 핵심은 △정무수석 김인규 MB선대위 방송전략팀장(훗날 KBS 사장) △국정기획수석 곽승준 고려대 교수 △경제수석 소장경제학자 B 씨(MB 선대위에서 활동) △외교안보수석 현인택 고려대 교수 △사회정책수석 박재완 한나라당 의원 등이었다. 정두언은 MB와 인사위에도 이 안을 전달했다. 당시까지 정두언은 정치권에 여전히 ‘인사 실세’로 알려져 있었다. 여론을 등에 업은 영향력은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2월 초 어느 날 인사위 회의가 소집됐다. 류우익은 정두언이 만든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안 중 특정인을 주목해서 들여다봤다. 현인택이었다. 참석자 중 일부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 대선 경선이 한창이던 2007년 여름 어느 날. 현인택은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전 대통령대외전략기획관) 등 외교안보자문교수단과 함께 MB에게 현안 브리핑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MB 옆에 류우익이 앉아 있었다. MB의 스피치라이터였던 류우익은 저명한 지리학자지만 외교안보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외교안보 브리핑을 듣겠다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현인택=“브리핑을 하려고 하니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류우익=“연설문을 쓰려면 여러 정책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둘은 MB를 사이에 두고 자존심을 건 논쟁을 벌였다. 브리핑 방식은 류우익 뜻대로 정리됐지만 둘 간의 감정은 그 후로도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류우익이 ‘현인택 외교안보수석’ 안을 본 것이다.
결국 몇 차례 회의를 거쳐 MB가 확정한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은 △정무수석 박재완 △국정기획수석 곽승준 △경제수석 김중수 한림대 총장 △외교안보수석 김병국 고려대 교수 △민정수석 이종찬 전 서울고검장 △사회정책수석 박미석 숙명여대 교수 △교육과학문화수석 이주호 의원 등이었다. 현인택이 ‘류우익 인사위’ 멤버인 김병국으로 교체됐고 정두언이 민 B 씨는 현재 한국은행 총재인 김중수로 바뀌었다. 김인규는 KBS 사장을 고집해 사회정책수석으로 유력하던 박재완이 자리를 옮겼다.
정두언은 2월 10일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 발표를 접하고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이후 인선은 더욱 류우익, 박영준의 페이스대로 진행됐다. 특히 청와대 비서관, 행정관, 정부 차관급 인선에선 정두언이 손 쓸 공간이 더더욱 줄어들었다. 한번은 청와대 행정관 인선을 놓고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주변에 대놓고 박영준을 비난하기도 했다. 정두언은 MB가 취임하던 2008년 2월 2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뒤늦게 대선을 마무리하며’라는 글을 올려 류우익, 박영준, 그리고 MB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대선 뒤처리 중 제일 크고 힘든 일이 (선거에서)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처우 문제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통 그 자체다. 오죽하면 낙선한 측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까. (…중략…)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부 인선이나 한나라당 공천은 총선에서 압승한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MB와 정두언이 이렇게까지 틀어지게 된 배경을 놓고선 아직도 여러 해석이 있다. 정두언이 MB 의혹 관련 자료를 한상률 국세청장에게 요구한 ‘또 다른 이유’에 대해 MB가 의문을 갖게 됐고, 이 과정에서 박영준과 SD가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말도 있다. 정두언은 MB에게 “국세청이 자료를 갖고 장난칠 수 있으니 관련자를 문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MB는 오히려 정두언이 ‘장난’칠 수 있다고 인식했다는 주장이다. MB와 정두언이 서로를 평생의 ‘정치적 동지’로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
취임 직후인 2월 말 어느 날. MB는 정두언과 초기 인선팀 몇 명을 청와대 내 관저로 불렀다. 점심을 함께하며 그동안의 수고를 격려하기 위한 자리였다.
MB=“지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봐, 들어줄 테니.”
놀란 정두언은 이 자리에서 그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인사 관련 부탁도 나왔고 MB는 대부분 수용했다. 정두언은 이후 한두 차례 더 만난 뒤 MB를 따로 만나지는 못했다. 이 자리를 지켜봤던 C 씨는 “지금 생각해보니 서로 정치적으로 ‘중간 결산’하는 분위기였다”고 기억했다.
MB 정부의 인선을 넘어 총선 공천까지 짜려 했던 정두언은 이렇게 빠르게 MB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이는 정두언-이재오-이상득(박영준)으로 나뉘어 있던 권력지형의 균형이 무너지고 이상득으로 힘이 쏠릴 것을 알리는 시그널이기도 했다. 역사엔 가정이 없다지만 정두언이 정치적으로 ‘실종’되지 않았다면 MB 정부의 5년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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