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다. 김정은의 북한이 요즘 남한사회에 퍼붓는 협박과 공갈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싸고 좌우파가 벌이는 최근의 역사싸움을 말한다.
발단은 ‘백년전쟁’이라는 제목의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됐다. 제목에서부터 ‘전쟁’을 들고 나온 이 동영상은 지난해 11월 26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시사회를 연 뒤 바로 유튜브에 공개돼 다양한 버전으로 재생산되며 지금까지 조회수 200만 건을 넘어섰다. 이 동영상은 본편(전체 4부작)과 번외편(2부작)으로 계획됐다. 현재 공개된 동영상은 본편의 1부 ‘두 얼굴의 이승만’(53분)과 번외편의 1부 ‘프레이저 보고서-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42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4·9통일평화재단(인혁당사건 사형수의 유가족이 세운 단체)으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지원받아 만든 이 동영상의 목표는 뚜렷하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까지 불리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한강의 기적’을 일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화가 허구라고 까발리는 것이다.
독재자로 비판받던 이승만, 박정희 두 사람의 공(功)이 과(過)보다 크다고 주장하던 학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일부 보수언론을 통해 이 동영상이 ‘왜곡’과 ‘날조’로 점철됐다며 ‘쓰레기’라고까지 비판하고 나섰다. 비판에만 머물지 않았다. ‘백년전쟁’의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동영상 제작에까지 나섰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류석춘)은 ‘건국의 예언자 이승만’(전체 7부작 예정)이란 동영상을 제작해 22일 유튜브를 통해 1부를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는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논란이 커지자 민족문제연구소는 16일 관련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었으나 “내외의 긴박한 상황을 고려하여” 보류한다고 밝혔다. 또 뉴라이트 계열의 시민단체인 사단법인 시대정신은 민족문제연구소에 공동 심포지엄을 제안했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를 받아들여 향후 공동 심포지엄을 추진할 예정이다.
역사전쟁은 ‘백년전쟁’을 둘러싼 논쟁에만 머물지 않는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대한민국사 정사(正史)를 편찬하려던 계획이 올해 초 물거품이 된 것도 편찬위원들의 이념성향을 둘러싼 학계의 논란 때문이었다. 2월에는 금성출판사의 고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공동저작자 3명이 교육과학기술부를 상대로 낸 수정명령취소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교과부의 수정명령을 취소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꺼져가는 듯했던 역사교과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최근의 이런 역사전쟁의 발화점 구실을 한 ‘백년전쟁’의 내용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근현대사 연구자와 이승만, 박정희 연구자 27명을 접촉했다. 이 중에는 ‘백년전쟁’에 직접 출연한 이도 있었고, 이를 맹비판한 학자와 중도적 시각을 견지하려는 학자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구체적인 역사 사실을 잘 모른다”며 한 발 빼거나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해 나서서 말하기 부담스럽다”며 몸을 사리는 사람도 있었다. 동영상을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안 봐도 뻔하다”며 맹비난을 퍼붓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언론에 이용당하는 것에 지쳤다”며 아예 만남 자체를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역사전쟁으로 우리 학계가 입은 내상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좌우파 이분법적 이념戰… 史觀이 史實을 압사시키다 ▼
■ 학자·전문가 20여 명이 본 ‘백년전쟁’ 논쟁
어렵게 취합한 전문가들의 대체적 의견은 “‘백년전쟁’의 상당 부분이 팩트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를 악의적으로 해석해 인신공격 수준으로 묘사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문제를 다루는 데 어떻게 전쟁이란 표현을 쓸 수 있는가. 그 내용의 타당성이나 좌우의 이념을 떠나 역사관의 문제를 전쟁으로 인식한 ‘백년전쟁’의 천박함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백년전쟁’에 출연한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백년전쟁’이 1919년 이전 이승만의 친일행위에만 초점을 맞추고 1919년 이후 독립운동을 부각하지 않는 등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는 있다”면서도 “논쟁은 바람직하지만 그것을 정치의 장으로 가져가 권력의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학문적 양심을 억압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역사 ‘해석’이 ‘사실’을 지배하는 형국
영국의 역사가 E H 카(1892∼1982)는 객관적 사료뿐 아니라 시대정신을 바탕에 둔 역사가의 해석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라고 말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쟁은 카의 이상과 달리 ‘사실’과 ‘해석’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무너지고 해석이 사실을 난폭하게 지배하는 형국이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쟁의 기원은 ‘백년전쟁’ 훨씬 이전인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세력의 비판적 역사관이 기존의 주류였던 우파 역사관과 본격적으로 충돌하면서부터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구호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지만 본격화한 것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첫해인 1998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제창한 제2건국운동 이면에는 이승만과 박정희 등 민주화 이전의 과거 정부를 통째로 부정하려는 인식이 숨어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취임 초부터 과거사 청산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고 정부 산하에 ‘친일 반(反)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설치했으나 과거사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역사관에 타격을 받은 우파는 2000년대 중반부터 뉴라이트 운동을 본격화하며 역사전쟁에서 반격을 가했다. 한반도 분단의 원흉은 미국과 남한이며 북한은 자주적 통일세력이라는 좌편향 인식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2006년 현대사 해석의 균형추를 바로잡는다는 취지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약칭 ‘재인식’)이 출간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사관에 입각해 1979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해 386세대의 현대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 ‘해방전후사의 인식’(약칭 ‘해전사’)의 편향성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재인식’의 기획과 출간 과정은 쉽지 않았다. 역사인식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색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는 글만 엄선한다는 편집 원칙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 기고를 회피했고 출판사들도 출간을 꺼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은 2008년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8월 15일의 명칭을 ‘광복절’에서 ‘건국절’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던 것이다. 보수단체와 학계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이 이룩한 민주주의, 경제성장 등의 성과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건국절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정갑윤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명칭 변경을 추진하는 법 개정안을 냈다 반대에 부딪혀 철회했다.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1948년 8월 15일로 볼 경우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의 의미가 축소된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역사전쟁은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편향성 시비로도 이어졌다. 2008년 고교 검인정 근현대사 교과서들이 좌편향적 역사 인식을 담고 있다며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모임인 교과서포럼이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펴낸 것이 발단이었다. 이를 두고 진보 성향의 역사학계에서는 “친일, 친미에 사로잡힌 역사 왜곡이다” “극우파가 잘못된 과거사까지 미화한다”며 우편향적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좌편향적 기술을 담은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수정을 명령했고 이에 반발한 저자들의 소송이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가 한국의 자랑스러운 발전사를 기록하자며 2008년부터 추진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은 지난해 말 개관하기까지 진통을 겪었다. 역시 역사관의 대립에서 비롯된 갈등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을 ‘민족 분단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과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는 시각이 맞서는 현실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 박물관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일방적으로 미화한다” “민주화 산업화 과정의 희생은 도외시한다” “보수 정권의 홍보 박물관”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반면 식민지와 전쟁, 가난이라는 역경을 딛고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른 기간 안에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봐야 한다는 주장도 팽팽했다.
한국사회 역사전쟁은 지상전이 아니라 공중전
한국사회에서 25년 넘게 이어져온 역사전쟁은 철저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생산적으로 토론하는 지상전(地上戰)이라기보다 각자의 이념과 정치 성향에서 발원한 역사관을 놓고 서로 상대방의 역사관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만 하는 공중전(空中戰)에 가깝다. 자신의 역사관을 일방적으로 뒷받침하는 사실들이 전쟁의 무기로 동원됐다. 근현대사를 ‘친일 대 반일’ ‘종속 대 자주’라는 이분법으로 단순화해 바라보는 현실에서 역사전쟁은 양측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만 달려왔다. ‘백년전쟁’도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역사왜곡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는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냐 독립운동가냐 하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친일파적 독립운동가’나 ‘독립운동가적 친일파’일 수도 있다. 즉, 친일과 반일 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지점이 있다”며 “역사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신공격을 할 게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근현대사를 다룰 때 좌우파의 역사관 가운데 무엇이 옳은지 싸우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과연 당대에 벌어진 ‘진실’은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지적이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20세기 말부터 사실을 신성시하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역사도 당대의 편견이 반영된 담론의 일부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이 확산됐지만 최근 들어선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사실 자체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경험주의적 전회(Empirical Turning)가 일어나고 있다”며 “역사적 진실은 도외시한 채 정파적 이념에 따라 역사를 재단하려는 자세부터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역사학계 원로인 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는 “서구학계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역사가를 좋은 역사가(good historian),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그에 부합하는 사실들만 끼워 맞추는 역사가를 나쁜 역사가(bad historian)라고 부른다. 역사가는 자신의 역사적 판단이 개인적 선입견이나 종교에 따라 편파적으로 흐르지 않는지 철저한 자기검증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도움말
‘백년전쟁’ 관련 구체적 사실관계 자문에 응한 전문가=김기협 전 계명대 교수(역사학), 김도종 명지대 교수(정치학), 김영봉 세종대 석좌교수(경제학),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정치학),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장(사회학),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주진오 상명대 교수(역사학), 허동현 경희대 교수(역사학)
간접적 도움말 준 전문가=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역사학),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사), 임지현 한양대 교수(역사학), 정성화 명지대 교수(역사학),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역사학)
▼ ‘백년전쟁’ 주장 ① 박정희는 미국의 꼭두각시… 한국경제 성장은 美 지시대로 개발 추진한 결과, “박정희 美가 만류했던 중화학공업 육석 밀어붙여” ▼ ■ ‘백년전쟁’ 박정희편, 학자들 견해는
‘프레이저 보고서-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는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시리즈의 번외편에 해당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두 얼굴의 이승만’으로 시작한 본편은 4부까지 제작하며, 프레이저 보고서는 2편까지 만들 예정이다. 연구소 측은 최근 프레이저 보고서 1부의 반응이 뜨거워 다음 달 2부를 완성해 내놓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본편보다 번외편이 반응이 뜨거웠던 이유는 뭘까. 백년전쟁을 연출한 김지영 감독은 올해 초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상황에서 공개된 이 영화가 가려진 역사의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줬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자평은 ‘해석에 따라’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분명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에 참여했을 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란 수식어는 진영을 막론하고 따라다녔다. 게다가 공개 당시 유력한 후보였고 이젠 대통령에 올랐으니 시의성만큼은 최고였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는지’에 대해선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과연 이 다큐가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전달했는가.
먼저 다큐 제목에도 등장하는 프레이저 보고서에 대해서 알아보자. 프레이저 보고서(Fraser Report)는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진 뒤 조직된 미국 의회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소위 프레이저 위원회)가 1978년 10월 제출한 보고서다. 코리아게이트란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로비스트인 박동선을 통해 미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전달한 일이 폭로된 사건이었다. 미 정가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이를 회유 매수하려던 시도였다.
문제는 보고서의 성격이다.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프레이저 보고서는 당시 최악의 상황에 빠진 한미관계에 대한 총체적 재평가를 목적으로 작성된 보고서”라며 “다큐의 주장과 달리 한국의 경제성장이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진단하는 데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맥락상 남한 정부에 대한 시각이 일부 등장하긴 하지만 그다지 주요하게 다루질 않았다는 설명이다.
다큐가 다루는 많은 내용이 보고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미 백악관 참모들이 박 전 대통령을 ‘스네이크 박’이라 불렀다는 대목에 대해 동아일보가 접촉한 20여 명의 학자 모두가 “들어본 적 없다”고 답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는 “다큐멘터리 내용을 꼼꼼히 짚어보면 프레이저 보고서를 인용한 건 2, 3건에 지나지 않고 일본 우익의 회고록이나 미 중앙정보국(CIA) 리포트 등에서 가져다 쓴 것이 많다”고 지적했다. 김지영 감독도 제작 과정에서 CIA 문서나 일본 극우파 전기를 섭렵했다고 얘기해 이는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
물론 출처 문제는 다큐가 다룬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는 별개다. 하지만 최근 논문 표절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근거를 명료하게 밝혔는가는 학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되곤 한다. 일각에선 인터넷에 공개한 영상물을 논문 검증과 같은 엄중한 잣대로 봐선 안 된다고 옹호한다. 그러나 이 다큐는 역사를 다루는 작품이다. 더구나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게 의도였다면 출처가 불투명한 논리 전개는 적절하지 않다.
이런 결점이 보인다고 해서 다큐가 전하는 내용이 모두 거짓이라고 매도하는 자세 역시 온당하지 않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 군사학교를 다닌 다카키 마사오 중위였으며, 1949년 남조선노동당 소속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법정에 섰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이로 인해 미 정부가 박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거머쥐었을 때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는 대목도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이 경제발전에 기여한 정도는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까지 없던 일로 덮을 수는 없다.
제3공화국 초기에 벌어진 경제정책의 시행착오도 마찬가지다. 박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수출주도형 산업화보다는 내수시장 키우기에 집중하는 ‘자립적 수입대체 공업화’ ‘내포적 산업화’를 지향했다. 화폐개혁이나 환율정책도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끝내 정책 수정을 겪어야 했다. 이런 변화에 미국이 상당 부분 개입했을 가능성 역시 크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논문 ‘1960년대 전반 개발전략의 전환과 그것의 경제사적 배경’에서 “박정희 정부는 초기 2∼3년간 체계적인 개발정책이 결여됐다”며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수입대체공업화 노선에 충실했으나 실적은 계획에 못 미쳤다”고 분석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당시 정권이 초기에 제대로 된 개발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고 판단할 만한 정황은 분명히 존재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결국 핵심은 하나로 귀결된다. 다큐의 또 다른 제목이기도 한 과연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이다. 아직 2부가 나오진 않았지만, 다큐가 주장하는 바는 간명하다. 박정희 경제 신화는 허구다, 당시 쿠데타 정권은 경제적 청사진 자체가 없었다, 꼭두각시처럼 미국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미국도 자국 이익을 위해서 한국을 이용했을 뿐이다, 한국 경제의 성장은 (의도했건 아니건) 미국의 작품이라는 것이 핵심 요지다.
역사에 대한 평가가 진영이나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뜻에서 같은 사료를 놓고 어떻게 해석하든 그건 다양성이 담보돼야 할 민주사회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그동안 한국 사회가 경제개발의 당위성에 매몰돼 한쪽 주장만 득세했던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공론화는 오히려 건강한 논쟁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열린 자세를 지향한다고 해도, 다큐가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정치적 역학관계나 시대상을 편의대로 재단하고, ‘박정희 때리기’라는 목표를 설정한 채 역사를 해석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많은 학자들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 가운데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쟁점도 이 대목이었다.
역사학자 김기협 씨(전 계명대 사학과 교수)는 “현대사를 개관하는 입장에서 양쪽의 입장을 모두 바라보려는 노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미국이 소련의 공산주의 확장에 대응해 자본주의 경제구조로 세계를 재편하려 힘을 쏟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추진하는 데 각국의 정치적 지도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간과할 순 없다. 미국이 많은 국가에 이런 전략을 썼지만 당시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이뤄냈던 나라는 대한민국과 대만뿐이었다.
오히려 다수 학자들은 한국의 경제성장 동력을 이전 정부부터 구축된 경제 기반과 당시 세계 경제의 흐름에서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과 그 성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었다. 경제개발을 위한 노력은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돼왔다. 이영훈 교수 논문에 따르면 철강공업이나 합판산업, 면방직공업은 이승만 정부 시절 전후 복구의 활발한 붐을 타고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했다. 경제개발계획은 장면 정부가 대체적인 초안을 마련했다. 허동현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는 “당시 미국은 한국 경제개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일본만큼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초기 경제성장에 미국의 지원이 도움이 되긴 했지만 결정적인 요소로 보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다.
다큐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풍기지만, 박정희 정부는 오히려 미국과 대치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미국이 그토록 만류했던 중화학공업 육성책을 끝까지 밀어붙인 것은 박 전 대통령의 선택이었다. 김용직 교수는 이런 점을 들어 박 전 대통령을 오히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고 평가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줄곧 미국의 입장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노력했다는 해석이다. 특히 말년에 핵개발을 밀어붙였던 것은 이런 성향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다큐는 박정희 비난이란 목표에 과도하게 집중하다가 가장 중요한 성장 동력을 홀대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바로 당시 경제 성장의 첨병에 섰던 기업가들과 가난을 이겨내려 열심히 일한 노동자 농민의 공을 소홀하게 다뤘다는 점이다. 이완범 교수는 “수출주도형 국가의 아이디어는 미국보다는 이병철 삼성 사장, 전택보 천우사 사장 등 기업인들과 경제 관료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지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미국의 영향을 너무 부각시키려다 국민을 우매한 군중으로 묘사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박 전 대통령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지만 산업현장을 뛰어다니며 이미지 조성에 열을 올렸고 국민들은 거기에 속아 열광했다고 마무리한다. 정말 그럴까. 피땀으로 이 땅의 경제 성장을 이뤄낸 아버지 어머니 세대를 무지한 촌부 취급하는 게 적절한 평가일까. 국민을 일방적으로 계도하고 가르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은 ‘백년전쟁’ 제작진 자신이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 ‘백년전쟁’ 주장 ① 이승만은 하와이 갱… 먼저 독립운동 기반 세운 의형제 몰아내려 테러 저질렀다 “테러 일어난건 사실… 이승만 개인 아닌 세력간 충돌” ▼
■ ‘백년전쟁’ 이승만편, 학자들 견해는
‘백년전쟁’의 본편 1부 ‘두 얼굴의 이승만’ 편이 제기한 논쟁점을 점검하기 위해 동아일보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를 두루 접촉했다. 국내 학계에서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로는 좌우를 막론하고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와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가 손꼽힌다. 하지만 한 보수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백년전쟁’을 맹비판한 유영익 교수는 “더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며 사실관계 검증 요구를 거부했다. ‘두 얼굴의 이승만’ 편에 잠깐 출연했던 정병준 교수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말하든 언론사의 입맛에 맞게 편집될 것”이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우여곡절 끝에 취재에 응한 학자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다빈치 코드’에 버금가는 팩션”(김용직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라는 대답과 “여자관계 빼고 나머지는 팩트”(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라는 반응이 나왔다. 최근 ‘이승만의 삶과 국가’란 저서를 펴낸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이승만에 대한 비판적 사관으로 팩트(사실)를 모으면 그는 형편없는 ‘갱스터’가 될 거고, 보수 사관으로 보면 독립외교를 한 애국투사가 된다. 어느 쪽이 맞다고 간단하게 얘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안 갱스터’인가
‘백년전쟁’의 충격적인 주장 중 하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성감옥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었고 미국 하와이 교민사회에 독립운동 기반을 먼저 만들었던 박용만과 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테러까지 저질렀다는 것. 다큐멘터리는 이승만을 ‘하와이안 갱스터’라고 표현했다. 이에 대해 대다수 학자는 테러 사건은 사실이지만 이승만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세력 간의 충돌로 봐야 한다고 했다.
“하와이 교민사회를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헤게모니 싸움으로 봐야죠. 하와이는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원이었어요.” 오인환 전 장관의 주장이다. 김영봉 세종대 석좌교수는 “박용만은 무장투쟁론자였고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자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간극이 컸다”고 했다. 허동현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는 “이승만의 눈에 박용만의 투쟁 준비 방식은 교포들의 성금을 헛되이 쓰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을 ‘갱스터’로 비하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했다.
‘백년전쟁’은 박용만이 이끌던 국민회 대의원들을 이승만이 폭동죄로 경찰에 고발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가 1918년 하와이 법원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와 판사에게 “박용만과 패당은 미국 영토에 한국인 부대를 설립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행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오면 파괴하려 한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의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이다. 조처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사회학)은 “증언 기록이 없다. 1918년이 아니라 1914년 검찰조사까지 다 받았던 사건으로 이승만의 밀고는 없었다”며 사실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도 성향의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와 역사학자 김기협 씨(전 계명대 역사학과 교수)는 “직접 자료를 보진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답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친일파였다는 근거로 1913년 그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한일합방 뒤 3년 동안 조선은 산업경제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고 말했고, 1916년 호놀룰루 신문에 “(자신은) 일본을 비판하라고 안 가르친다”는 기고를 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류 원장은 1913년 워싱턴포스트 기사를 보여주며 “날조”라고 반박했다. 해당 표현의 첫 문장은 ‘한일합방 뒤’가 아니라 ‘지난 3년간(Within the space of three years…)’으로 시작된다. 미국 감리교 측이 한국에 15만 달러를 지원해 직업교육이 잘돼 가고 있다는 취지였다는 것.
하지만 인터뷰 시점이 한일 강제병합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인 데다 “전차 레일이 깔리고, 도시마다 전기 불빛이 들어오고, 공장과 백화점이 곳곳에 생기고 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미국 개신교계 헌금의 결과로만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재테크?
이 다큐는 이승만이 하와이 독립운동조직인 국민회를 장악해 학교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수법으로 재테크를 했다고 주장한다.
김기협 씨는 이승만을 이재(理財)에 아주 밝았던 사람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이 해방공간에서 운산금광 운영권을 미국인에게 팔아먹어요. 이 일로 사이가 좋았던 미군정의 존 하지 사령관과 틀어집니다.”
반면 류 원장은 “거짓말”이라고 했다. 당시 법인이 없어 개인 명의로 학교 재산을 샀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재정과 회계에서만은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허동현 교수도 “이승만은 턱시도 대여나 호텔에 투숙 때도 영수증을 챙겼다”고 했다.
다큐에는 1924년 상하이임시정부 개혁파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려 하자 이승만이 미국에서 오는 독립운동 자금을 끊어버렸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대체로 맞다는 쪽이었다. 다만 노선투쟁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상하이보다는 미국에 있어야 한다는 게 이승만의 생각이었어요. 상하이임정이 미국에 있었다면 미국의 무기 지원을 받으며 싸울 수도 있을 텐데요.”(오인환 전 장관)
동영상에는 이승만이 임정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임정에 “독립자금 모금 중단하라. 정부에서 걷은 돈도 다 나에게 넘겨라”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부분도 사실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김기협 씨에 따르면 이승만이 미국에서 세력을 키우기 전까지 미국에서 상하이임정으로 직접 오는 돈이 있었지만 이승만이 조직을 키운 뒤에는 모든 자금을 통제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류 원장은 무장투쟁에 돈을 못 내겠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학위와 여자문제는?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미국 하버드대에서 학업을 못 따라가 석사를 못 마쳤지만, 감리교단에 힘을 써 프린스턴대로 옮긴 뒤 학교 측을 움직여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이승만이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들어갈 때도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달라고 하면서, 학부를 마친 조지워싱턴대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다고 말하며 하버드대와 협상을 했다”고 주장했다. 김기협 씨도 “당시 선교단체들이 이승만의 학위 취득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했다.
반면 김용직 교수는 “악의적 해석”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은 박사학위를 따려는 사람에게 석사과정에 대한 강제가 거의 없다”고 했다. 허동현 교수는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은 당시 프린스턴대에서 책으로 출간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이승만의 여자문제도 제기됐다. 46세에 미국 오벌린대 여대생 노디 김과 미국 전역을 여행하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경찰에 잡혔다는 것이다. 당시 부도덕한 성관계를 위해 주 경계를 넘는 것이 금지됐다. 이 부분은 학자들의 주장이 엇갈렸다.
이완범 교수는 “노디 김의 아들 사진을 보면 이승만과 노디 김 아들이 너무 닮아 학계에서도 화제가 되긴 했다”고 말했다. 류 원장은 “이승만과 노디 김은 우연히 같은 열차를 탔던 것이며 결과적으로 무혐의 처리됐다”고 했다. 김도종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설사 이게 사실이라 해도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했다.
다큐에는 이승만이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1932년) 뒤 김구에게 “어리석은 짓들 좀 작작해라. 독립운동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충고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 이승만이 간도대학살(1920년) 후 상하이임정 대통령 연두교서를 통해 “우리 형편상 전쟁 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생업에 종사하며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싸우자”라고 말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부분 학자들은 그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인하진 않았지만 당시 현실성 떨어지는 무장봉기론에 맞서 장기적인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이승만의 노선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김구를 이승만의 대척점에 놓고 바라보는 ‘백년전쟁’의 기본 시각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이승만이 1920년대 초 탄핵으로 상하이임정의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며 임정과 거리를 둔 것은 사실이지만 김구가 임정을 장악한 1930년대 이후 두 사람은 지속적 협력관계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허동현 교수는 “1941년 상하이임정 주석이던 김구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정권대사로 임명했다”며 “광복 이후의 정치적 노선 차이를 광복 이전까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적용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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