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과 미래창조과학부는 창조경제를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창의적인 사업을 벌이는 창업경제’라고 정의했다. 구체적인 모델로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이스라엘을 꼽았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미국의 거대 인터넷 기업이나 이스라엘의 보안전문회사 체크포인트, 미라빌리스 같은 강소(强小)기업을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그런데 국내에선 이런 기업을 만들 정책을 이끄는 사람 대부분이 통신 전문가다. 실리콘밸리와 이스라엘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벤처기업가, 인터넷·소프트웨어 전문가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 통신 전문가가 장악한 한국의 창조경제
한국에서 창조경제의 헤게모니는 통신 전문가들이 잡고 있다. 첫 미래부 장관 후보는 김종훈 전 미국 벨연구소 사장이었다. 최문기 미래부 초대 장관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전자식 전화교환기(TDX)를 개발했다. ICT 분야를 담당하는 미래부 2차관은 KT 부사장 출신의 윤종록 차관,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ICT 자문 역할을 한 윤창번 전 새누리당 방송통신추진단장도 하나로텔레콤 출신이다. 사실 ICT라는 표현 자체가 통신업계에서 주로 쓰는 용어다. 일반적으로는 정보기술(IT)이란 표현이 더 널리 쓰인다.
이는 초고속인터넷과 이동통신망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보급하면서 ‘IT 강국’이란 명성을 쌓았던 한국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통신은 기본적으로 수도, 전기, 도로 같은 인프라 건설업이다. 진정한 IT 산업의 경쟁력은 좋은 인프라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위에서 생산되는 뛰어난 제품에서 나온다. 이것이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기업으로 대표되는 인터넷과 소프트웨어 분야다.
○ 벨 헤드 대(對) 넷 헤드
한국보다 IT 산업의 역사가 긴 미국에서는 이런 인프라를 담당했던 통신 전문가들이 IT 산업 전반에 나섰던 시기를 거쳐 1990년대 후반 이른바 ‘닷컴 버블’ 이후 인터넷·소프트웨어 전문가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미국 IT 업계는 이를 가리켜 ‘벨 헤드(bell head) 대 넷 헤드(net head)의 대결’이라고 부른다. 벨은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서 나온 말로 통신 전문가를 뜻한다. 넷 헤드는 1990년대부터 급성장한 인터넷·소프트웨어 전문가들이다. 구글을 창업한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벨 헤드는 넷 헤드들이 통신사의 인프라를 이용해 무료 통화 등을 제공하면서 ‘무임승차’한다고 비난해왔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이후 NHN, 다음, 넥슨, 엔씨소프트, 카카오 등이 급성장하면서 이 기업인들이 대표적인 넷 헤드로 떠올랐다. 똑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졌다. 통신사들은 연일 인터넷 기업이 통신사가 투자한 통신망에 무임승차한다고 비난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넷 헤드들의 목소리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직속 기구로 설치한 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의 구성을 보면 전체 위원 19명 가운데 IT 관련 인사가 4명이다. 이 중 부위원장인 윌리엄 프레스 오스틴 텍사스주립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를 뺀 3명이 전·현직 기업인이다. 에릭 슈밋(구글 회장), 크레이그 먼디(마이크로소프트 전 최고연구전략책임자), 마크 고렌버그(선마이크로시스템스 출신 벤처투자자)가 그들이다. 벨 헤드로 분류할 수 있는 인사는 한 명도 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성장이 정체된 AT&T나 버라이즌 같은 통신사보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인터넷·소프트웨어 기업이 미국 경제에 훨씬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 통신과 인터넷은 IT 발전의 양 날개
벨 헤드와 넷 헤드는 IT 산업의 발전을 이끄는 두 날개다. 하나라도 없으면 날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에선 이 균형이 벨 헤드 쪽으로 지나치게 쏠렸다. 마이크로소프트 출신 IT 평론가 김국현 에디토이 대표는 “행정부는 물론이고 국회에서도 최근 재·보궐선거에서 당선한 안철수 의원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넷 헤드라 불릴 만한 사람이 없다”며 “정부가 소프트웨어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정책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넷 헤드 기업인들도 적극적으로 정치인이나 다른 산업군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올해 인터넷산업리더스포럼(가칭)을 만들어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다양한 산업계 최고경영자(CEO)와 교류하며 상호 이해를 늘려 나갈 계획이다.
포럼 설립을 추진하는 김상헌 인터넷기업협회장(NHN 대표)은 “국정 과제에서 인터넷과 소프트웨어 분야가 홀대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건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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